OCTOBER.15.2025
오래간만에 비가 그치고 날씨가 참 좋다.
나가지 않을 수가 없는 햇볕에 무작정 가방을 싸매고 나왔다.
햇볕이 조금은 뜨겁고 바람이 선선하다. 전에 봐둔 둘레길로 요즘 마음에 든 카페로 향한다.
걷는 길은 그늘이 거의 없었고, 무거운 가방과 더불어 도톰한 가을셔츠 덕분에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내딛는 걸음마다 풀벌레가 뛰어가고, 앞뒤로 고추잠자리와 흰나비가 날아다녔다.
웃음이 흘러나오는 반짝이는 모습들. 알던 길을 벗어나 모르는 길로 들어서니 가느다란 좁은 천이 나왔다. 천천히 흐르는 천을 따라 보라색 물옥잠 꽃이 피어있다.
“어라 아직까지 피어있나?” 갸우뚱 거리며, 카메라를 들어 자세히 보려고 하는데 화면 안으로 천둥오리 커플이 쓱 들어온다. 귀여운 오리 커플은 잠시 꽃 쪽으로 다가갔다가 유유히 다시 돌아 나간다. 나도 다시 발길을 돌려 걷는다.
곳곳에 계절 모르고 피어있는 민들레, 씀바귀, 물옥잠, 둥근 잎유홍초 같은 작은 꽃들이 마음을 꽉 채운다. 느긋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카페 앞. 카페 안에는 예상한 것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다. 오래 앉아있으면 엉덩이부터 다리가 저린 증상이 있기 때문에. 너무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가장 최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살펴봤다. 마음에 쏙 드는 자리도 없고 날씨도 좋으니 야외 테이블에 앉기로 결정하고 키오스크로 주문한 뒤 밖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가을이 되면 땅콩이나 밤 같은 견과류가 다람쥐마냥 먹고싶어서, 커피는 너티플랫화이트로 정했다.
그림을 그릴까 하고 이것저것 도구를 꺼내는데 드륵. 메뉴가 나왔다는 메시지가 온다.
참, 사람이랑 대면할 일 없는 요즘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며 커피를 받는데, 가져가려는 접시를 살며시 붙잡고 직원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밖에 앉으시려면, 일회용 잔으로 받아가셔야 하는데, 옮겨 담으면 내용물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괜찮으실까요?”
무슨 말이지? 미간이 좁혀지고 이해는 했지만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나는 다시 물었다.
“여기 야외 테이블에 앉으려면 일회용 잔에 먹어야 한다고요?”
직원분은 다시 난처한 표정과 함께 답한다,
“네, 담아드릴까요?”
나는 당황했고 순간 짜증도 났다. 하지만 자리를 옮기는 귀찮음과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리에 앉는 불편함보다, 이 예쁜 상태의 커피가 어그러지고 맛도 뒤죽박죽 되는 데다가 일회용 컵까지 써야 하는 상황이 더 싫었다. 그래서 몸을 틀며,
“아니에요, 자리를 옮길게요”
라고 작은 분노를 표현(?)했다.
실내가 좀 더 덥기도 했고 야외자리에 세팅해 놓은 것들이 아깝기도 했고 슬며시 화가 올라왔다. 펼쳐둔 짐을 대충 챙겨서 아까 두리번거리다 봐둔 창가 자리로 짐을 옮기고 커피를 가져와 앉았다.
’아 기분 좋았는데,
으 이 자리는 구석이라 그런가 좀 덥네,
옆에 테이블 하고도 좀 가깝네.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나왔는데 날씨 좋은 날, 미간을 있는대로 좁히고 있기는 싫어서 일단 노트북부터 켰다. 그리고 이렇게 줄줄이 글을 쓰다 보니 그 사이 더운 것이 가셨다.
더운 게 나아지니 짜증이 가라앉았다. 좀 차분해지고 나니, 울컥 올라왔던 ‘화’라는 이름의 감정이 이름표를 달고 내 앞에 섰다. 요즘 화가 좀 많아졌다고 느끼고는 있었는데...(특히 운전할 때 심하다) 그 이유가 뭘까? 나도 그 누군가처럼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걸까.
어떻게 살고 싶냐 물으면, 이루어야 할 구체적 일의 성과나 목표보다 ‘억울한 할머니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답하는 나는. 이런 상황이 가장 두렵다.
매 순간 선택했든 하지 않았든 내 삶을 내가 영위했음에 의심이 없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억울하다는 것은 그렇지 못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삶의 후반부로 갈수록 억울하지 않으려는 것에 집착하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 같은 상황에서 감정 컨트롤을 못하거나, 자주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남으로 돌리려는 행동은 결국 억울함을 불러올 것이다. 난 정말이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답은 현문우답일까.
감정이 사그라들고 나니 잠이 쏟아진다. 또 나는 쉽게 무기력으로 도망치려 한다.
연기 연습하는 언니에게 힘을 조금만 뺐으면 좋겠다는 어쭙잖은 조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언니가 한 답이 생각난다.
“힘을 빼면 아주 빠져버려서 그대로 멈춰버릴까 봐, 그래서 못 빼겠어, 그래서 억지로라도 유지하려고 하게 돼”
그래서 화가 많아진 걸까?...
오늘 글의 요지는 없다. 요지 없는 날들 보내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하기는 싫고.
하여간. 오늘의 좋음. 기쁨. 불쾌함. 화남. 차분함. 무기력함. 등등을 기록한다.
그래도 날씨 좋으니까 좋다. 조금 있으면 또 비가 또 온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