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찬 백수 생활
나는 가끔씩 새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이런저런 말과 더불어 ‘커피 마시는 재미로 산다.’고 덧붙일 정도로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 맛 자체도 좋아하고 ‘술도 좋지만 술자리가 좋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커피’라는 말 자체에 들어있는 것 같은 여유로움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시간’도 좋아한다.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어서 꼭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커피는 내가 어른이 되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커피를 전혀 마시지 못했다. 나는 커피가 맛있어 보이는데 먹고 싶은 만큼 마셔도 될 것 같은 엄마는 한 입도 못 마시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크면 엄마 몫까지 다 마셔주리라 다짐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고 막상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그러지 못했다. 커피 향만 맡았을 때보다 그것이 생각만큼 맛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다는 옛날 어른들과 같은 이유로 즐겨 마시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카페에 갈 일이 많아졌다. 특히 어릴 때는 그렇게 못하게 하던 걸 성인이 되자 꼭 카페에 가지 않더라도 커피를 권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생각과 다르게 공부를 할 일이 많이 생겼다. 성인이 되면 공부를 안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가속화되었다고 할까? 다만 지금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점에서 학창 시절과는 차이가 있다. 이런 시간에 나는 꼭 커피가 필요했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때 조금 더 하고 싶은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 커피를 찾는다. 직장을 다닐 때는 잠 때문에 늘 피곤함을 달고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커피를 찾게 된 것 같다.
출근할 때 일주일에 2, 3번은 커피를 사들고 들어갔다. 매일 마시지는 말자는 게 나름의 원칙이었다. 그게 피곤함을 이끌고 출근하는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작고도 크고 크고도 작은 위로였다.
커피를 좋아한다고 하면 집에서 추출해서 먹는 기계가 있는지 묻거나 없다고 하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나는 커피를 카페에서 사 먹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의 커피 값이 비싸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여유도 부리지 못한다면 난 너무 힘들 것 같다.
출근하며 커피를 산다고 여유 있는 척 하지만 실은 단 5분의 여유도 없어서 헐레벌떡 간신히 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단 10분만이라도 아니 5분만이라도 앉았다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래서 아마 백수가 되면 하고 싶은 것 1순위가 된 걸 것이다.
나는 백수가 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낮 시간에 카페에서 책 읽기였다. 요즘 유행하는 캠핑이나 여행 같은 것도 아니고 정말 소박했다. 일단 하루 종일 잠을 자는 것, 청소를 열심히 해서 집 단속을 하는 것, 운동 및 악기 등을 배우러 다니는 것, 주말뿐 아니라 언제든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것, 하루 종일 영화 보는 것 등 모두 백수의 생활에서 불러오고 싶은 것들이지만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이런 것들의 나열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다하고 있나 자꾸 돌아보게 만든다.
커피를 마시면서 책도 보고 공부를 하는 걸 즐겨하다 보니 정말 하기 싫은 것을 할 때도 커피와 함께 할 때가 있다. 아니 정작 꼭 필요할 때는 이럴 때이다.
대학 시절에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제가 많다. 부담이 되는 과제이다. 주제가 주어지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처음부터 막막할 때가 많다. 정해진 날짜 안에 제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작을 해두기도 하지만 피할 수 있으면 언제까지고 피하고 싶다. 그래서 제출하기 전날까지 작성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럴 때에 나는 커피가 필요하다. 자정 이후 커피를 한잔 들이켜면서 오늘은 잠을 자지 않고 여기에만 집중할 것이라는 선전포고를 하는 의식을 혼자서 치른다. 하지만 이런 것을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 다른 친구들에서도 그런 비슷한 말을 들을 수 있다.
"보고서 제출하기 하루 전에는 이상하게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 그렇게 미루던 게 어쨌든 작성을 하게 되는 것 보면 말이야!" 힘든 과제를 제출한 날 점심식사 자리에서 동기가 과제의 후기를 핵심을 찔러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과제로 인해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시름 놓이는 순간이었다. 다들 제출하기까지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알 수 있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느껴지는 이런 때에 그나마 의지가 되는 카페인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람들이 ‘카페인 충전’, ‘카페인 수혈’ 등의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카페인의 힘을 빌려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꼭 카페인을 먹어서 덜 피곤한지는 모르지만 먹었다는 사실로 힘을 내고 싶다는 걸로 짐작한다.
엄밀히 말하면 꼭 카페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카페인과 같이 나에게 직, 간접적으로 힘을 줄 만한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꼭 카페인이 아니어도 본인에게 카페인과 같은 효과를 주는 것을 만들어 두면 좋을 것 같다.
예를 들면 내 친구에게 카페인과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은 술, 즉 알코올인 것 같다. 그 친구는 커피를 전혀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같이 카페에 가도 친구는 카페인이 전혀 없는 차 종류를 마신다. 그러나 알코올에는 관대한 것 같다. 그래서 술은 그 친구를 기분 좋게 해주는 나에게서 커피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속 깊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술 한 잔씩이 필요했고 혼자서도 가끔 술을 마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꼭 나쁘다고 무작정 말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많은 위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부분 이해가 되었다. 실제로 착실하게 자신의 일을 잘하고 있는 성실한 친구이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장점이 있지만 카페인과 다른 점은 꼭 술만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술이라고 정했을 때는 술을 마시면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혼술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색을 하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에게 카페인이 작용을 하듯 술이 그런 효과를 준다면 다른 대체 식품을 찾을 때까지 굳이 지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필요할 때 나에게 힘을 주는 것 하나는 보장이 되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