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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고래 Apr 17. 2023

잘 쓰이고 싶은 시간

다채로운 색의 축제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  종이컵 중간쯤에 이렇게 쓰여 있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 “가능할까? 아니 기분 좋은 덕담이겠지, 누구나의 바람처럼” 

이 문구를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온전히 타인을 위해 살아보았던 시간이 있었나?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내 앞의 발등만 보고 살기에도 충분히 빡빡했던 세월이었다. 


 결혼해서 자식 낳아 키우며 보낸 세월이 인생의 반을 훨씬 웃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신년 계획을 세우고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물론 그런 계획들은 연말쯤 점검해 보면 일부는 실천했고 또 어느 부분은 기억을 세운 것조차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이런 모양새도 습관이 되어 뻔뻔스럽게 실천하고 안 하고의 결과에 마음 쓰며 연연하지는 않았다.   

   

 올해는 자원봉사 항목을 계획에 끼워 넣었다. 집 근처 도서관 자원봉사 일정을 점검했다.  1월 초쯤에 그해의 봉사 일정 공지가 올라왔다. 할까 말까를 고민하며 마음으로 저울질을 하느라 한 달을 다 보냈다. 말일경이나 되어서야 도서관을 찾았더니 봉사 자리가 딱 1개 남아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1시까지. 뭉그적거리느라 내가 원하는 시간대가 없었다. 새벽쯤에 잠들고 늦은 오전에 일어나는 생활습관 탓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 잠시 또 고민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요즘은 봉사도 경쟁인가 보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너무 모른다 싶었다. 1년 동안 적은 시간이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도전해 보자 마음먹었으니 미루지 말자고 생각했다. 도서관 사서 일은 직업으로도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어쩌다 도서관을 이용할 때마다 여기서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주 들었다. 그러나 기회가 닿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퇴직을 하고 시간에 여유가 생기다 보니 이렇게라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도서관 일은 지역 주민이 대출했던 책이 돌아오면 한국 십진분류법에 따라 도서를 정리하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주제를 총류, 철학, 종교,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과학, 예술, 언어, 문학, 역사 순으로 10가지로 분류한다. 그렇게 분류해 놓은 다음 자음과 모음을 사전 순으로 배열해서 도서관 고유의 일련번호를 작성한다. 


 서가 배열은 별치기호, 분류기호, 저자기호, 권차기호, 복본기호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은 이런 자료를 기초로 해서 정리가 되어있다.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은 단순했다. 장르와 번호에 맞게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으며 서가를 정리하는 일이다. 나에게 배당된 구역은 1층 어린이 도서관이다. 


 몇 년 전부터 노안이 시작되어 작은 글씨는 돋보기를 쓰고 봐야 했다. 허리를 굽히고, 서가 맨 아래쪽에 쪼그리고 앉아 자음과 모음의 순서와 번호를 동시에 찾다 보니 책을 정리하는 속도가 느렸다. 도서관 직원이 5권쯤 정리할 때 겨우 한 권을 정리했다. 그래도 처음 하는 일이니 느려도 괜찮다며 자신을 격려했다.  

   

직원 1 : 통 털었어요? 

직원 2 : 아니요. 조금 더 기다렸다가 털려고요

봉사자 : 통을 터는 게 무슨 뜻이에요?

직원 1 : 도서관 밖에 배치된 도서 반납함에서 책을 가져오는 일이요

봉사자 : 아! 통 털이 그들만의 대화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통을 털어오면 유아, 아동, 영문 순으로 책을 분류해서 서가 꽂아놓으면 된다. 그래서 짬짬이 틈이 생긴다. 그 시간에 그림책을 본다. 다양한 크기의 판형과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책을 보며 느꼈던 경험은 좀 놀라웠다. 내가 아이를 키우던 시절의 그림책과 느낌이 너무 달라서 새로운 영역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림책이 이렇게까지 발전했는지 몰랐다. 그림도 너무 독특해서 내용을 떠나 그림만 봐도 재밌다. 글자도 커서 돋보기를 쓰지 않아도 쉽게 잘 보였다. 


 책이 많이 쌓이는 날에는 직원이 ‘선생님 안 그래도 예쁜데, 진짜 별거 아니에요.” 기분 좋은 농담을 하며 앞치마 주머니에 화장품 팩 하나를 쓱 넣어주셨다. “정말 고마워서 그래요,” 또 다른 직원은 작은 과자 한 봉지를 내밀며 “선생님 천천히 하셔도 돼요”라며 쓱 지나간다. 소박하고 따뜻한 그들의 마음 씀에 피곤함이 가라앉았다.


 도서관이 조금 한가할 때는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어보았다. 빼곡히 들어찬 책들 사이를 걷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오래된 종이 냄새, 많은 사람이 보고 지나간 흔적의 손때 묻은 책은 용도에 맞게 잘 쓰이고 있었다.      

 어떤 일을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도움을 주는 행위가 자원봉사의 사전적 의미이다. 그러나 나에게 자원봉사는 남을 돕는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 보려는 소소한 노력이다.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잘 쓰였던 시간, 봉사를 마치고 도서관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볼에 와닿는 바람이 기분 좋게 시원했다. 시작은 겨울이었는데 벌써 여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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