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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병일 Mar 26. 2024

8. 곰탕,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고스톱 승부

  

        

  결혼식을 마친 K의 딸 부부는 이 주 뒤면 호주로 떠나야 했다. 출국 일주일 전 세종의 사돈 네로 양가가 모였다. 1박 2일 예정으로 내려갔던 길이 2박 3일이 된 건 K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것도 K의 딸, 곧 사돈네의 며느리가 졸라서 그리된 것이었다.


  금요일이었던 첫날 저녁 사부인이 소고기 곰탕을 맛있게 끓여 대접해 주었다. 사돈네 식탁은 화학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나물과 콩 반찬들로 가득했다. 진하고 구수한 국물이 우러났던 곰탕은 사돈 내외처럼 고고하고 맑은 맛이었다. K는 친환경적이고 산뜻한 음식들을 먹으며 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K는 ‘설거지를 누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딸 부부와 집에서 지내는 동안 설거지는 K가 도맡아 했었다. 아내가 결혼식을 총감독하고 연출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감당하는 동안 요리와 청소 등 돌봄 노동을 K가 스스로 맡은 것이었다.


  K의 솔직한 속내는 기꺼이 사돈네에서도 설거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돈 부부 입장에선 K의 설거지가 난처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딸만 생각하는 팔불출 아버지가 될 것만 같아 K는 차마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설 수 없었다.


  딸은 남편 옆에서 마냥 행복해하며 곰탕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K는 ‘저 딸이 설거지를 해 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버지가 결혼식 날 “딸과 사위에게 노예가 돼주고 싶다”고 했어도 사돈네에서 설거지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것 정도는 헤아려 주길 바랐다.


  하지만 딸에게선 설거지를 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달 동안 부모 집에서 한 번도 설거지를 한 적 없었던 은결은 시부모님 집에서도 설거지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양쪽 가족들이 저녁을 다 먹었을 때 K가 넌지시 말했다.

  “설거지는 은결이가 하는 건가…”


  딸은 아버지 말을 못 들었는지 반찬 정리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사위가 알아서 아내의 쉴드를 쳐주었다.

  “은결이 설거지시키면 안 돼요. 장인어른도 서울에서 저한테 시키지 않으셨거든요.”

  은결은 남편 말을 듣고 좋아하며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K가 기대했던 모습,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라고 말하며 고무장갑을 끼는 모습을 딸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설거지는 결국 사부인이 했다. 다음 날 점심을 먹은 뒤 돌아갈 며느리와 사돈이었기에 그리 배려하신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은 후 차를 마시며 출국을 앞둔 딸 부부를 중심으로 수다 꽃을 피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음이 이어진 즐거운 대화였다. 이국땅에서 새 삶을 헤쳐 나가야 할 젊은 부부를 향한 응원과 사랑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딸은 K 부부에게 하룻밤 더 머물고 가자고 노래를 했다. 은결은 어린 시절 친척 집에 놀러 온 아이처럼 마냥 행복해했다. 설거지 같은 건 안중에 없고 그저 즐겁기만 한 딸이 K는 의아하면서도 신통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남편을 극진히 대접한 일들을 믿고 저러나 싶었다.     



  다음 날 오전에 온 식구들이 세종시 수목원에 다녀왔다. 서울에선 접할 수 없는 광대한 크기의 수목원이었다. 구경하며 걷다 보니 사돈 부부와 사위, K가 앞서 있었고 아내와 딸은 뒤처져 있었다.

  “엄. 마!”

  은결의 외침에 K가 뒤를 돌아보았다. 길에서 뭔가를 본 딸이 화들짝 놀라며 엄마 품에 호들갑스럽게 안겼고, 모녀가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K가 사돈 부부 들으라는 듯 사위에게 말했다,

  “재민아, 신부가 어려서 손이 많이 가지?”

  “아니에요, 아버님.”


  사위의 목소리에서 K는 진심을 느꼈다. 재민은 즐거워하는 아내와 장모님을 보며 마냥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K의 딸은 유학 시절 방학마다 집에 왔던 때처럼 사돈네서도 푹 퍼져 지내고 있었다. 호주에서는 저렇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K는 왠지 사돈 부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날 사부인이 큰 며느리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큰 애는 사회생활을 십 년 넘게 해서 그런지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몰라요. 척하면 착이에요. 작은 애는 착하고 해맑은 모습이 너무 좋구요.”


  사부인은 두 며느리 각자의 장점이 다 좋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큰 며느리에게 믿음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였다. 엄마와 장난을 치며 오고 있는 딸을 보며 K가 사돈 부부에게 말했다.

  “제가 딸을 너무 오냐 오냐 키운 것 같아요. 저 애기를 어쩌면 좋죠, 하하….”

  “아니에요, 살림하는 거 보면 아주 야무져요.”

  사부인은 오히려 며느리를 두둔해 주었다. 사돈도 그저 며느리를 예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수목원 근처 순두부 맛집에서 점심을 먹다가 사돈 부부의 권유를 듣고 K 부부는 하루 더 묵기로 했다. 저녁엔 K가 만두전골을 만들기로 했다. K는 사돈네로 가다가 마트에 들러 만두와 소고기, 버섯류 등 장을 보고 들어갔다.


  만두전골을 하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표고버섯과 느타리버섯, 양송이버섯, 팽이버섯, 애호박, 쑥갓, 배추 등 재료 준비에 손이 많이 가긴 했지만, 소고기 육수와 새우젓, 간장으로 맛이 보장된 요리였다. 사부인이 충분히 만들어 놓은 곰탕 국물이 더해져 일품 만두전골이 만들어졌다. 사돈 부부와 딸 부부, K 부부까지 모두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었다.


  K는 만약 아내가 저녁을 준비했다면 다른 분위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사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을 터였다. 알게 모르게 요리 솜씨가 비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사돈네 남자가 요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칭송받을 일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그리 올바르지 않은 인식이었으나 아직은 현실이 그랬다. 저녁을 먹은 후에도 K의 딸은 설거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돈이 마지막 밤이라고 며느리를 위해 고스톱 한판을 벌일 준비를 해 주었다. 몇 주 전 딸 부부와 함께 속초로 여행 가서 훌라 카드 게임을 한 후로 K 가족은 밤마다 훌라를 했다. 돈을 따는 건 늘 은결이었다. 사위도 훌라의 재미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십여 년 전 동생네가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까지 K 가족은 명절마다 훌라를 했었다. 그땐 거의 K가 땄었는데 이번엔 딸에게 맥을 못 췄다. K 부부가 딸에게 털린 돈이 삼십만 원이 넘었다.


  사부인은 고스톱을 칠 줄 모른다며 빠졌다. 두 명씩 광을 팔면서 다섯 명이 고스톱을 했다. 사돈은 고스톱을 많이 해본 듯한 빼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은결의 운을 당하진 못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엄청난 놀음 운이 딸과 함께하는 듯했다.


  점수를 쌓으며 고스톱을 날 때마다 딸은 행복에 겨운 웃음을 터트렸다. 딸의 행동 하나하나가 ‘현재를 생동하게 만드는’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쌍피를 까고 ‘고’를 외칠 때마다 딸의 얼굴에서 꽃망울 터지듯 기쁨이 펑펑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K는 딸아이에게 있는 현존의 능력을 엿보게 되었다. ‘저 아이에게는 현재를 눈부시게 빛나게 하는 능력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사돈이 며느리의 카르페 디엠에 장단을 잘 맞춰 줘서 고스톱을 하는 내내 웃음과 탄성이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행복하고도 아쉬운 밤이 깊어 갔다.     


  다음 날 아침 밥을 먹은 후에도 은결은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K의 아내도 내내 설거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K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사부인, 오늘은 제가 설거지를 하겠습니다. 집에서 항상 하던 가라서 아주 익숙하거든요.”

  사부인이 펄쩍 뛰며 K를 말렸다.

  “아유,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하면 돼요.”


  그 와중에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은결이 고무장갑을 집어 들더니 냉큼 K에게 달려오며 외쳤다.

  “아빠, 여기 있어. 호호호호!”

  “은결아, 너…!”

  사부인이 며느리를 나무라며 고무장갑을 가져갔다. 까르르 웃어젖히는 철딱서니 없는 딸을 보면서도 K는 웃음이 났다. 얄미워도 귀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구제불능이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침을 먹고난 K 부부는 사위를 남겨 둔 채 딸만 데리고 서울로 출발했다. 사위는 부모님과 함께 기거하다 열흘 뒤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주차장에서 딸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꼭 끌어안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감사와 기쁨을 한아름 안겨 드리는 진심 어린 포옹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K는 철없는 며느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시는 사돈어른들에게 깊은 감사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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