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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병일 Mar 29. 2024

9. 보리굴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굴비하는 부부 되


          

  K는 아들의 결혼식에서도 덕담을 하게 되길 은근히 바랐다. 동생의 결혼식에서 아버지의 장황한 덕담에 치를 떨었던 아들이었다. 한결은 자신의 결혼식은 부모님 덕담 없이 목사님의 주례와 축가로 ‘전통적’ 방식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덕담을 거의 써두었던 K는 살짝 섭섭함을 느꼈지만 아들 부부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사부인과 서진은 시아버지가 덕담을 해주길 바라는 듯했다. 요리와 집안일을 강조하는 내용일 거라 예측되기 때문일 터였다.

  그 후로 아들 부부로부터 K에게 덕담을 부탁드린다는 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서진보다 한결의 의견이 우세했던 모양이었다.     


  결혼식 3주 전 예식장에서 양가 가족들이 뷔페 시식을 했다. 먹는 걸 대단히 중요시하는 아들이 낙점한 곳답게 뷔페 음식이 종류도 다양하면서 맛도 좋았다. 입 안에서 녹는 듯한 육회의 감칠맛을 느끼며 K가 말했다.

  “제가 덕담은 못하게 됐지만 이 자리에서 짧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저희 집에 오면 딸과 사위한테 했던 것처럼 꼭 그대로 하겠다고요.”

  사부인의 얼굴에서 안도와 행복의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딸이랑 사위가 왔을 때 요리는 물론 설거지도 안 시키고 청소도 안 시켰잖아요. 아들 부부가 와도 요리나 설거지는 제가 다 하려구요. 아들 집에 가면 아들이 다하기도 하구요.”


  사부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유, 그래도 설거지 정도는 시키세요.”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딸이나 사위한테 안 시켰던 걸 며느리한테 시키면 그건 쓰레기가 되는 거잖아요.”

  K의 말에 사돈 부부와 K 아내의 웃음이 터졌다. 예비 부부는 옆 테이블에서 즐겁게 초밥을 먹고 있었다. 


    

  K의 아들 결혼식은 아름답게 치러졌다. 서진은 한결과 결합되는 예식을 온전히 즐기는 듯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 직원이 “안 떨리냐?”고 물었을 정도로 서진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모습이었다. 한결의 얼굴에서도 밝고 행복한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결혼 예식은 간결하고 ‘평범하게’ 끝났다. 평범하게 잘 살길 바라는 부모의 바람과도 잘 맞는 결혼식이었다. 아들이 가장 중시했던 뷔페 음식은 대성공이었다. 많은 하객들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식당을 떠나지 않고 뷔페를 즐겼다. 예식이 토요일 마지막 순서였기에 여유롭게 저녁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하객들에게 제공될 수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3주 뒤, 사돈 부부가 K 부부를 한정식집으로 초대했다. 토요일 저녁에 외곽의 한정식집에서 신혼부부와 양쪽 부모들까지 여섯 명이 모였다. 고등어구이와, 간장게장, 보리굴비 등을 푸짐하게 시켰다. 기본 정식에 추가된 음식들이어서 상당한 가격이 나왔다. 주요리 뿐만 아니라 반찬 하나하나가 맛있어서 아까운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신혼부부 이야기를 하다가 요리 이야기가 나왔다. 집에서 요리를 전담하는 한결은 서진이가 좋아하는 나물들까지 만들며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었다. 지난 신정에도 본인은 좋아하지 않는 떡만두국을 아내를 위해 맛깔스럽게 만들어 먹는 사진을 올렸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부인이 빼먹지 않곤 하던 말을 다시 했다.


  “아유, 우리 서진이도 요리를 좀 해야 되는 데요.”

  사부인은 “남편이 너무 잘해서 서진이는 엄두를 못 낸다”며 웃었다. K의 아내가 며느리를 두둔하며 말했다.

  “어휴, 한결이 빨래가 장난 아니에요. 물리치료하면서 땀난 옷들 매일 내놓잖아요. 서진이가 그 옷들 다 빨래하면서 청소도 엄청 깔끔하게 하더라구요. 그거면 충분하지요.”


  K는 집에서 자신이 찌개 만드는 일을 전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K의 아내가 자신은 가끔 반찬 요리만 해서 찌개 끓인 지가 너무 오래됐다며 “이젠 찌개 끓이는 법을 까먹은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사부인이 부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그렇게 요리를 나눠서 하면 좋잖아요.”


  그러자 사돈이 “요즘 집에서 아침을 제대로 안 차려줘서 가끔 엄마 생각이 나기도 해요”라는 말로 웃음을 주었다. 사부인이 “당신도 요리를 좀 배우라”며 타박을 했다. 감정을 살피는 일에 예민한 서진이가 아버지를 두둔하며 말했다.

  “그래도 아버진 집에서 못 고치는 게 없잖아. 화장실 환풍기도 척척 갈아주시고.”


  공연히 요리 얘기를 꺼내서 사돈을 곤혹스럽게 만든 게 미안했던 K가 조금 오버스럽게 말했다. 

  “우와! 그러시군요. 전 집에서 ‘마이너스의 손’이에요. 제가 뭘 고치면 다 부러지거나 망가지더라구요. 요리마저 안 했다면 전 아마 빵점이었을 겁니다, 하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친밀감을 느끼다 보니 격식을 차리지 않는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사부인이 신혼 때 시누이가 함께 기거했던 일을 떠올리며 한 맺혔던 이야기를 꺼냈다. 사돈은 그 얘길 아직도 한다며 속상해했다. 


  “그때 여동생이 우리 애들도 자주 봐주고 청소도 하면서 많이 도와줬잖아.”

  사돈의 말을 듣고 난 K의 아내가 사부인 편을 들며 말했다.

  “아무리 좋은 시누이라도 신혼집에서 함께 지내는 건 무조건 싫은 거예요. 내 딸이 그런 일을 겪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싫잖아요.”

  K 아내의 깔끔한 정리였다. 그녀 역시 지지 않고 신혼 때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저도 많이 당했어요. 한결이 가졌을 땐데 시누이가 김밥이 먹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배불뚝이 몸으로 김밥 재료를 사 와서 열심히 만들어놨거든요. 그랬는데 그새 쇼핑하러 나갔던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저녁을 먹고 왔다는 거예요.”


  K 아내의 고초도 만만치 않았지만 시집살이 배틀은 결국 사부인의 승리로 끝났다. 네 명의 시누이가 근처에 모여 살며 시집살이를 시켰다는 것으로 승부가 결정돼 버렸다. 그 말에 놀라는 신혼부부에게 K가 말했다.

  “90년대는 가부장제가 지금보다 심했어. 다들 시가에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고.”

  K의 아내가 아들 부부에게 생색을 냈다.

  “난 없는 살림에 시어머니 부양까지 해야 했어. 너희는 양쪽 부모님 챙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으니?”

  서진이 “네, 어머님”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K 아내가 말했다.

  “우리는 두 사람 일로는 싸울 일이 없었어. 다 시가 일로 싸웠지.”


  “저희도 다툴 때가 있어요. 제가 본가에서 일본식 식탁을 가져왔거든요. 외출하게 돼서 전 여기저기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한결이는 식탁에 앉아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서진은 그때 “식탁에 있는 것들을 같이 정리해 주면 좋겠다”고 남편에게 감정표현을 했다고 했다. 서진의 놀라운 장점은 자신이 바라는 욕구를 분명하게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평가나 판단, 비교, 합리화 등의 폭력적 언어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둘은 싸울 일이 생기지 않는 듯했다. 서진에게는 ‘내가 옳다’는 태도가 없었다.


  사돈이 신혼부부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부싸움을 할 땐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은 안 해야 돼. 누구나 지켜주길 바라는 선이 있거든. 그걸 넘으면 안 돼.”

  K와 아내는 그 말을 듣고 사돈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한정식집에서 흡족한 식사를 마치고 나온 뒤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사부인이 알고 있던 곳이었는데 널찍한 공간과 목재 친화적인 인테리어가 쾌적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다. K는 사돈 부부를 따라 달걀노른자를 넣은 쌍화탕을 주문했다. K의 아내는 오미자 차, 아들 부부는 커피를 시켰다. 케이크 두 개도 함께 주문했다.


  레인보우 크레이프 케이크를 먹다가 K의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살짝 마찰이 있었다. K와 아내는 크레이프 케이크를 포크로 위에서 아래로 찍어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이 “이건 한 겹씩 벗겨 먹는 건데”라고 말했다.

  K는 “그러냐” 하며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K의 아내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야. 이렇게 찍어 먹는 거야”라고 말하며 다시 찍어 먹었다. K의 아들도 그냥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렇게 먹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한 겹씩 먹는 게 맞다”고 계속 주장했다. K의 아내 역시 “아무렇게나 먹어도 된다”며 계속 우겼다. ‘누가 옳은가?’ 게임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들 옆에 있던 서진이 “그게 뭐가 중요하냐?”며 남편을 달랬다. 그 모습을 보며 K는 서진이 아들의 아내가 된 것에 다시 한번 큰 감사를 느꼈다.


  K는 십여 년 전 온 가족이 스포츠댄스를 배우다 아내와 아들이 싸운 일이 떠올랐다. 댄스를 배우고 집에 돌아와서 네 식구가 다시 연습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K의 아내와 아들이 서로 자기 동작이 맞다고 싸움이 났다. 모자는 한 시간 가까이 자신이 옳다는 주장을 꺾지 않았었다.

  잠시 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난 한결이 말했다.

  “크레이프 케이크도 그냥 잘라 먹는 거래요. 한 겹씩 벗겨 먹는 거 아니래. 엄마가 맞았네요.”

  ‘T’인 아들의 장점은 쿨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카페를 나서기 전 몇 주 뒤 구정 때 신혼부부가 양가를 어떻게 방문하면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K의 아내가 공평한 제안을 했다.

  “서진아, 구정날 아침엔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어. 저녁엔 부모님 집에 가서 먹고. 추석엔 반대로 하고.”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생각이었다. K가 며느리에게 물었다.

  “서진이 만두 좋아하지?”

  “네, 저 만두 정말 좋아해요.”

  “우리 집에선 만두 좋아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자주 못 해 먹었거든. 이번 구정엔 내가 떡만두전골 해줄게.”

  서진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네, 저 너무 좋아요.”

  “이번엔 며느리 덕분에 떡만두전골을 식구들 눈치 안 보고 만들 수 있겠네. 나도 좋다.”

  사돈과 사부인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K 부부가 시가와 친정에 대해 동등한 입장을 갖게 된 데에는 세종 사돈의 영향도 컸다. 그분들은 ‘며느리’라는 인식 없이 은결을 자식과 다르지 않게 대해 주었다. K 부부는 그분들을 따라 할 뿐이었다. 그렇게 명절엔 양쪽 부모님 집으로 한 번씩 밥 먹으러 오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카페를 나서니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엔 대설주의보가 내려질 거라는 기사가 포털에 떠 있었다. 신혼부부의 앞날을 축복하는 함박눈이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새내기 부부와 부모님들이 정겨운 시간을 보낸 뒤 주차장에서 헤어져 각자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하얗게 뒤덮인 차도를 천천히 운전하던 K의 머릿속에 하나의 문장을 떠올렸다.

  “옳고 싶으세요, 사랑하고 싶으세요?”


  어느 심리학자가 옳기를 선택하지 말고 사랑하기를 선택하라며 한 말이었다. K는 한결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서진은 늘 사랑을 선택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설이 나무와 집들, 차도까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난 보리굴비가 제일 맛있던데?”


  아내의 말에 자신도 그랬다며 K가 고개를 끄덕였다. K는 아들 부부의 삶이 굴비의 맛과 같기를 바랐다. 굴비라는 말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 전남 영광으로 유배 갔던 이자겸이라는 선비가 그 이름(屈-굽히다, 非-아니다)을 지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실은 이름이었다. K는 아들 부부가 결혼 생활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라도 굴비하기를 흰 눈이 쏟아지는 하늘에 빌며 천천히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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