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아들은 몇 주째 토요일과 일요일에 8시간씩 물리치료사 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있었다. 서진이 용인까지 차를 몰고 가서 태워 와도 집에 도착하면 저녁 7시가 다 됐다. 한결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준비했다.
K의 아내는 3주 차부터 아들 부부에게 일요일 저녁엔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그 주엔 전날 고교 동창 부부를 초대하여 푸짐하게 만들었던 제육볶음 남은 것으로 아들 부부가 맛있게 먹었다.
4주 차 일요일엔 K의 아내가 K에게 닭볶음탕을 준비해 보라고 했다. 닭볶음탕도 한 달 전 딸이 호주에서 왔을 때 꽤 호평을 들은 음식이었다.
일요일에 K 부부는 교회 주방에서 봉사를 하고 예배 전후 성가대 연습을 하고 돌아온 뒤 지쳐서 잠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난 K는 닭볶음탕을 만들러 주방으로 갔다. K가 만들려는 닭볶음탕은 <하루 200마리 파는 강서구 닭볶음탕 전문점 레시피>였다.
자른 닭에 설탕과 소금, 후추를 넣고 우유에 재워두는 게 첫 요리 순서였다. K가 싱크대에 가보니 아내가 벌써 닭을 우유에 담가놓은 게 보였다. K의 아내는 감자와 당근, 파와 양파까지 깨끗이 준비해 놓았다. 이런 날은 K가 손쉽게 요리를 하게 되는 날이었다.
K는 웍에 파와 기름, 고춧가루, 마늘을 넣고 파기름을 충분히 냈다. 거기에 닭을 넣고 간장과 설탕을 섞어 달달 볶았다. 물을 붓고 감자와 당근을 크게 썰어 넣은 뒤 양파와 마늘을 넣고 푹 끓였다.
레시피엔 없었지만 아내가 넣어달라고 한 양배추도 넣었다. 다시 푹 끓였더니 양배추가 흐물흐물해지며 진한 국물 맛이 났다.
아들 부부는 K가 내놓은 닭볶음탕을 야무지게 털어먹었다. 그동안 K가 한 요리 중 아들이 최애 요리로 꼽았던 건 제육볶음이었다. 그랬던 아들이 닭볶음탕이 1위로 올라갔다며 실로 오랜만에 아버지의 요리를 인정해 주었다.
서진은 다이어트 중이라면서도 자꾸 주방으로 가서 닭볶음탕을 퍼담아 왔다. 그 모습을 보며 한결이 놀렸다.
“서진아, 그냥 다이어트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편에게 말했다.
“나 다이어트 하는 거야. 여기 봐. 다 감자랑 당근이잖아.”
한결은 서진이 맛있는 음식을 만날 때만 양이 많아진다며 웃었다. 서진은 국물 남은 그릇을 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밥을 담아와 맛있게 비벼 먹었다. K는 다이어트와 맛 사이에서 갈등하다 맛에 굴복하는 며느리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서진은 K처럼 국물 요리를 좋아했다.
텔레비전에서 호주오픈테니스대회 결승전이 치러지고 있었다. 이틀 전 서진이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 병원에 갔다 왔던 날엔 준결승전이 중계되었다. 그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진료 후 저녁을 먹으며 데이트를 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K와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유명 전문점의 샌드위치를 사왔다.
K과 아내, 서진은 네 종류의 샌드위치를 삼등분하여 골고루 나눠 먹었다. 서진은 K에게 테니스 규칙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며 재미있게 경기를 관람했다. 스스럼없이 시부모와 테니스 중계를 함께 보는 며느리를 보며 K는 고마움과 행복감을 느꼈다.
그날 대화를 나누다 K는 며느리에 대해 더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아들은 여느 ‘이대남’들과 다르지 않은 반페미니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친페미니즘 야당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열렬한 여당의 지지자였다. 친가와 처가의 가족들이 모두 진보적 성향이었기에 한결 혼자만 보수주의자인 셈이었다.
며칠 전 서진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 대해 남편과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그때 한결이 발끈하면서 친여당 인사들이 하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K 부부는 그런 아들과 충동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정치적 대화는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서진은 달랐다.
“저는 정치적 성향이 달라도 대화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한결이한테 그랬어요. 서로 생각이 다른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구요. 하지만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대화할 수 있지 않느냐고요. 왜 갑자기 평소와 다르게 격해지냐고요.”
그랬더니 남편이 조금 수그러들었다고 했다. K의 아들은 자신의 부모보다 포용력이 넓은 배우자를 만난 게 분명해 보였다.
테니스 결승전을 방송하던 채널이 갑자기 테니스 중계를 중단하고 아시안컵 호주와 인도네시아의 축구경기를 중계했다. K가 한탄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게 뭐냐? 호주오픈 결승전 대신 다른 나라 축구 16강 전을 방송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아들이 흥분한 K를 달래며 말했다.
“아빠, 인터넷에서 테니스 방송되는 사이트 내가 찾아 줄게.”
K에게 노트북을 건네받은 아들은 쉽게 사이트를 찾아 호주오픈테니스결승전이 중계되는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들 덕분에 K는 응원하던 선수가 2대 0으로 지고 있다가 3대 2로 대역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K는 저녁 내내 아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아들의 사랑스런 아내는 차로 용인까지 오고 가며 기사가 돼주었고, 아버지는 8시간 교육을 끝내고 온 아들에게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는 닭복음탕을 해주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무생채와 버섯볶음 반찬을 만들어 싸주었다.
한결과 서진은 (시)부모님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 충만한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젊은 부부는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는 등 사랑이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진은 테니스 결승전을 끝까지 보고 싶어했지만 아들이 그만 일어나자며 떠날 채비를 했다.
아내가 아들에게 반찬을 싸주는 동안 K는 웍에 남아있던 닭볶음탕 국물을 빈 통에 담았다. 그걸 본 아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일 볶아 먹을 건데 왜 담아놔?”
“웍을 설거지해 놓으려고.”
그 말을 들은 아내가 가볍게 K를 타박했다.
“그럼 내일 또 다른 냄비에 볶아야 되잖아?”
“난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으려고 했는데.”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서진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김이랑 깻잎이랑 나물 넣고 볶으면 더 맛있어요.”
며느리의 말을 듣고 나서야 K는 “그렇겠구나” 하며 통에 있던 국물을 도로 웍에 부었다. K의 아내가 부드러운 스푼을 건네며 국물을 싹싹 긁어 넣으라고 하자 K가 거부하며 말했다.
“어허, 설거지 또 늘어나잖아. 본인이 안 한다고 그릇을 막 쓰네.”
그 말을 듣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크게 웃었다. 서진은 재미있어하며 웃었고, K의 아내는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아들 부부는 한 손에 반찬 그릇이 담긴 봉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여보, 가자.”
서진은 남편을 사랑스럽게 ‘여보’라고 부르고 있었다. K는 결혼 한 달 만에 ‘여보’라는 말이 술술 나오는 서진이 신기했다. 신혼 때 K는 왠지 모르게 ‘여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었다. 일 년 뒤 아들이 태어난 후에야 그는 여보라고 아내를 부를 수 있었다. 어느덧 여보가 된 젊은 부부를 배웅하며 K는 흡족한 기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