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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병일 Apr 12. 2024

13. 고구마케이크, 아내를 ‘애기’라고 부르는 아들


  아내가 K에게 닭볶음탕이 먹고 싶다고 한 날이었다. 아들 부부가 단톡방에서 선물 받은 케이크 갖고 와서 함께 먹어도 되느냐는 문자를 올렸다. 아내가 대뜸 “아빠가 닭도리탕 해주신대”라며 허락했다.

  K는 전날 새벽 다섯 시경에야 잠이 들어 몇 시간 자지 못한 상태였다. 무거운 몸이었지만 아들 부부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이는 일은 늘 즐거웠으므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K는 속으로 아내가 자신이 음식을 만들지 않고 뒤처리도 하지 않으니 막 초대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사실은 K의 아내도 아들과 며느리가 좋아하는 채나물과 버섯볶음 같은 밑반찬을 만들어 싸 보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틀 전 고등학교 교과서 집필진 회의를 하고 온 K는 마음이 바빴다. 새로 생긴 스포츠 문학과 예술 파트를 맡았는데, 기존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라서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이었다. 관련 논문을 부지런히 읽어 보았으나 목차를 구성하는 일부터 쉽지가 않았다.

  K는 작업하다가 오후 네 시경 졸음이 쏟아져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깜박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갑자기 아내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뭐 해? 닭이랑 쪽파 사 왔어?”

  “어…? 몇 시야? 네 시 반쯤 됐나?”

  “다섯 시가 넘었어. 얼른 가서 닭이나 사 와!”


  ‘아들 부부가 7시 반쯤 올 텐데 왜 저렇게 서두르나’ 하면서 K는 일어났다. 전날 세 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은 몸이 여전히 무거웠다. K는 발을 질질 끌며 마트로 가서 닭볶음탕용 닭과 닭다리 한 팩을 사 왔다. 아내가 부탁한 쪽파는 깐 게 없어서 사 오지 못했다.     

  집에 도착한 K는 큰 볼에 닭을 넣고 우유를 부었다. 잡냄새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닭을 재워 놓은 동안 양파와 파, 감자, 당근을 준비했다. 며느리가 좋아하는 버섯도 잘라놓았다.

  삼십 분 뒤 파기름을 낸 뒤 고춧가루와 마늘, 닭고기를 넣고 볶았다. 물과 감자, 당근을 넣고 푹 끓였다. 간을 보니 좀 약한 듯하여 레시피에 없던 조청을 한 숟갈 더 넣었다. 마지막으로 양파와 마늘을 넣고 끓였다. 

  거실 소파에 누워 있던 아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해. 애들 여덟 시에 온대.”


  시간이 사십여 분 남아있었다. K는 불을 약불로 맞춰 놓은 뒤 안방으로 들어가 교과서 작업을 좀 더 했다.

  여덟 시 십 분이 넘었는데도 아들 부부는 들어오는 기척이 없었다. K의 아내는 여덟 시 이후에 저녁을 먹으면 속이 부대껴 먼저 먹으려 했다가 아들 내외를 기다리는 쪽으로 방향을 브꿨다. K는 약속 시간보다 늦곤 하는 아들 부부에게 살짝 짜증이 났다. 그는 이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침대 누워 눈을 다시 눈을 붙였다. 그러곤 아들 부부가 늦는 걸 피곤한 몸에 휴식을 줄 기회로 여기며 고마워하기로 했다.     



  아들 부부는 여덟 시 이십 분이 넘어 도착했다. 아내가 반갑게 맞는 소리 서진이 “어머니” 하며 아내를 안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우리 애기!”

  아내의 말을 듣고 난 한결이 “왜 애기라고 하냐”며 제 엄마에게 웃으면서 타박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간 K도 아들 부부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와라!”

  “아버님, 저번 주일에 아버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지난 일요일에 K는 얼굴의 점을 수십 개 뺀 상태라 1부 예배를 드리고 일찍 돌아왔었다. 며느리의 살가운 말을 듣자 K의 입에서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고맙다.”


  K가 주방에서 닭볶음탕을 그릇에 퍼담는 아내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 간은 K의 아내가 했다.

  “요즘 엄마가 나보다 간이 세던데. 짜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네….”

  K의 아내가 거실 식탁에 그릇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너무 달아서 액젓을 더 넣은 거야. 그래도 좀 달아.”

  “그랬구나. 사실은 간이 약한 것 같아서 레시피에 없던 조청을 한 숟갈 넣었어. 하하, 들켰네.”

  K의 말에 서진과 아내가 웃었다. 아들이 김말이초밥을 식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만들어 오느라고 더 늦었어.”

  한결은 15분 만에 마끼초밥을 후딱 만들어왔다고 했다. 마끼를 집어먹고 난 K가 말했다.

  “음! 역시 어렸을 때부터 초밥왕 만화 열심히 보고 초밥집 사장님 되고 싶어 하더니, 맛이 끝내주네.”


  서진은 살짝 단 닭볶음탕을 맛있게 먹어주었다.

  “서진이가 잘 먹어주니 기분 좋네. 내가 설탕 섭취를 줄이자면서 또 실수를 했네. 레시피보다 닭고기 양이 많다 보니 양념 조절을 잘못한 것 같아.”

  K의 말을 듣고 아내가 말했다.

  “그럴 땐 간장만 좀 더 넣고 설탕은 나중에 맛을 보면서 추가하는 게 좋아.”

  “나도 같은 지론을 갖고 있었거든. 양념은 나중에 간을 보면서 추가한다. 그런데 레시피대로 덥석 넣을 때가 있어.”

  서진이 웃으며 K에게 말했다.

  “아버님, 전 아직도 밥을 잘 못한다고 한결이한테 혼나요.”

  한결이 “서진이가 한 밥이 너무 꼬들거려. 눈금을 잘 맞추고 하는 대도 그래. 쌀을 너무 박박 씻어서 그런 것 같아”라고 말했다.


  K가 접시에 마지막 남은 마끼를 먹으려던 순간이었다. 한결이 젓갈로 마끼를 슥 집더니 서진의 입으로 쏙 넣어주었다.

  “우리 애기 맛있게 먹어.”

  그날 한결은 아내를 우리 애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K가 재미있어하며 아들에게 말했다.

  “한결이 누나를 애기라고 부르네.”

  한결은 결혼 전에 누나라고 부른 게 억울해서 애기라고 부르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내한테 한번도 애기라고 불러준 적 없었던 K는 살짝 마음이 뜨끔했다. 서진은 남편이 그렇게 불러줄 때마다 사랑스런 애기처럼 행복해했다.     



  잠시 뒤 K 가족은 일본에서 날아온 고구마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식성이 비슷한 서진과 K가 맛있게 먹었다. 고구마케이크는 물 건너온 음식답게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으며 환상적인 맛을 느끼게 했다.

  “지난주에 식당 봉사할 때 몇 분 안 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지난 주일에 한결 부부가 속한 두레가 식당 봉사를 했다. 서진의 말에 K의 아내가 원래 두레 인원은 열 명 넘지만 주일 아침에 식당 봉사 나오는 사람은 서너 명밖에 안 된다고 말해주었다.

  “저희는 그렇게 봉사하니까 너무 좋더라구요.”

  아들 부부처럼 젊은 부부가 식당 봉사를 나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K는 그런 한결과 서진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지난주 토요일 저녁에 서진이 단톡방에 식당 봉사 몇 시까지 가야 되냐고 물었었다. 아내가 ‘9시까지 오면 돼. 우린 8시 반부터 가 있을 거야’라고 답글을 올렸다. 서진이 봉사일이 아닌데 왜 오시냐고 물었다. 그때 K가 ‘서진이와 한결이를 맺어준 교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루다가^^’라고 답글을 달았다. 그 글을 보고 아들 부부가 너무 멋지시다고 답했었다.


  매 주일 K 부부는 여덟 시 반부터 열 시까지 한 시간 반 동안 식당 봉사를 한 뒤 성가대 봉사를 하러 연습실로 올라갔다. 식당 봉사 제안은 K가 아내에게 먼저 한 것이었다. K는 아들이 이렇게 멋지고 귀한 짝을 만난 것이 너무 감사했고, 그런 인연을 맺어준 교회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힘든 봉사 중 하나인 식당 봉사를 하는 일이 돌고 돌아 아들 부부에게 좋은 에너지로 돌아갈 거라고 K는 확신했다. 좋은 운은 그렇게 남에게 베풀 때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결은 제 부모 앞에서 아내를 애기라고 부르며 스킨십을 자연스럽게 했다. MBTI T 성향 10인 아들에게서 저렇게 놀라운 F를 끌어내는 서진이 K는 놀랍기만 했다. 얼마 전 단톡방에 K가 서진과 은결을 칭찬하는 내용을 올렸었다.

  -서진이와 은결이의 공통점 ; 행복하게 사랑받을 줄 알아서 사랑을 주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

  그 글 밑에 바로 서진의 답글이 달렸다.

  -아버님~ 한결이도요~~

   한결이도 은결이도 상대방을 너무 행복하게 해줘요♡

 

  그 글을 읽고 아차 싶었던 K는 서둘러 ‘맞아 맞아~^^’라고 답해주었었다. 서진은 그렇게 남편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필 줄 아는 아내였다.

  젊은 부부는 매일 OTT로 웰메이드 드라마를 몰아보기 하며 드라마 치유를 하고 있었다. 가끔 함께 게임도 하는 듯했다. K는 아들에게 이렇게 딱 맞는 짝을 준 인연에 다시 한번 감사를 느꼈다.

  어느덧 시간이 아홉 시 반이 넘어있었다. 한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아버님, 전 이럴 때가 가장 아쉬워요. 더 있고 싶은데….”

  서진의 얼굴은 더 머무르고 싶어 하는 진심으로 가득했다.

  “서진이는 한번 이야기꽃을 피우면 시간 가는 줄 몰라. 그래서 내가 챙겨야 돼.”

  남편이 다음 날 새벽에 스터디가 있다는 말을 듣고 서진도 일어섰다.     

 

 아들 부부를 보낸 뒤 K는 은근히 아내가 설거지를 또 해주려나 하는 바람을 가졌다. 자식들의 방문 시 모든 요리와 설거지를 전담하기로 한 건 K였다. 지난 구정 땐 아내가 어쩐 일로 설거지를 해줬었다. K는 또 그런 일이 일어나길 은근히 바랐으나 아내는 그럴 의사가 없어 보였다. 하루 종일 외출을 하고 돌아온 아내도 몹시 피곤해 보였다.

  K는 주방으로 가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설거지를 하며 다시 햇살 님의 시어머니를 떠올렸다. 2주에 한 번씩 자녀 부부를 초대해서 대장금급 요리를 해준 뒤 설거지도 못 하게 하고 돌려보냈던 부모. K의 나침반이 돼 준 ‘그분’에게 그는 다시 한번 감사를 느꼈다. 설거지가 기쁘고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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