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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병일 Mar 19. 2024

6. 한우 갈비탕, 요리를 몰랐다면 할 수 없었던 덕담

     

   

  결혼식을 앞두고 희희낙락한 것은 K의 딸 뿐이었다. 가장 부담을 많이 가진 건 K의 사위인 듯했다. 요즘 세대의 결혼식은 신랑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쇼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 트렌드다.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뭔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사위의 마음을 점점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K으로 말하자면 사위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신부 아버지 덕담이라는 퍼포먼스를 치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3주 전 사위의 형 결혼식이 있었다. 그날 사돈어른은 신랑 아버지 덕담을 여유 있고 유머러스하게 해주심으로써 큰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이제 K에게 그 막중한 역할이 주어진 것이었다.     


  K의 인생을 돌아보니 이보다 더 큰 중압감을 느끼며 해냈던 인터뷰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십여 년 전 첫 번째 책을 냈을 때 KBS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 동영상을 촬영했을 때였다.

  <책 읽는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의 ‘보이는 라디오’ 촬영을 앞뒀을 때만큼 삶에서 무거운 압박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때 미리 받은 질문지를 달달 외울 정도로 연습을 하고 간 덕분에 이십 분 분량의 인터뷰를 무난히 촬영할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그 일 년 뒤 <손석희의 시선집중>의 생방송 인터뷰를 할 때였다. 당시 한부모 가정 학생들에 대한 급식지원비가 갑자기 중단되어 담당부장업무를 맡고 있던 K가 모 신문에 글을 기고했었다. 그날 오후에 시선집중 피디로부터 연락이 와서 다음 날 아침 바로 인터뷰가잡힌 것이었다.

  일 년 전 <책 읽는 사람들> 촬영 인터뷰를 감당해냈던 경험 덕분에 K는 손석희와의 생방송 인터뷰도 무난히 치러낼 수 있었다. 십 분 정도의 인터뷰가 나가자마자 교육청으로부터 학교로 연락이 올 정도로 방송의 위력이 컸다. 며칠 뒤 <세이브 더 칠드런>의 지원으로 한부모 가정에 대한 급식비가 제공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인터뷰 덕분에 잘 해결된 것이었다.


  두 번의 경험으로 K는 오직 연습만이 살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연습만큼 중요한 것이 덕담의 내용, 곧 콘텐츠였다. K는 한 달 전부터 원고를 다듬었다. K에겐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몰입감을 줄 만큼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세 번은 내빈들의 웃음을 터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딸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

  직원 한 분이 식전에 K와 딸을 불러 신부 입장 예행연습을 시켜 주었다. 로프트가든이라는 예식장 이름답게 신부가 위층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입장하는 방식이었다. 은결과 K는 재미있게 입장 연습을 했다.

  애초에 K는 딸에게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하는 방식을 권했었다. 그랬는데 딸이 아빠랑 꼭 같이 들어가고 싶다고 하여 그에 따르게 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딸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면 K는 일생일대의 경험을 놓칠 뻔했다.     


  예식이 시작되기 5분 전 K는 딸을 맞기 위해 식장 위층에 서 있었다. 난간 아래로 하객들이 가득 들어찬 예식홀 풍경이 조용하고도 활기차게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걸어올 딸을 기다리는 그의 마음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찼다.

  이윽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이 눈부신 신부가 되어 걸어오고 있었다. 늘씬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살며시 걸어 온 딸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K는 세상 행복한 아버지가 되어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치 딸과 K만이 존재하는 듯한 충일한 행복감이 두 사람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인 딸의 행복한 미소에 전염되었기 때문인 듯했다. K의 얼굴에서 절로 기쁜 미소가 피어났다. 


  계단을 내려온 뒤 K는 딸과 걸음을 맞춰 레드카펫을 밟으며 신랑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신부와 신랑 사이에서 출렁이는 사랑의 에너지를 느끼며 걸었다. 하객들의 축하와 박수에 떠밀려 걸어가는 동안 가슴속으로 평화가 가득 차올랐다. 온전한 현존을 느낀 순간이었다.     

  꿈결 같은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사위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전날 K가 “재민아, 나 내일 너랑 포옹할 때 뽀뽀할 수도 있다”고 했던 말을 듣고 사위는 기겁을 했었다. K는 사위를 뜨겁게 포옹한 뒤 꽉 끌어안은 채 잠시 있었다. 사위를 향한 감사와 사랑으로 벅찬 포옹이었다. 나중에 사위는 그 순간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K는 신부 부모님 석에 앉아 딸의 결혼 예식에 참여했다. 신부 아버지 덕담 시간이 다가오는 동안 K는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편지를 읽어주는 시간에 은결은 담백하고 생기있게 신랑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다. 밝고 따뜻한 편지였다. 재민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신부를 향한 깊은 애정을 절절히 고백했다. 나중에 은결의 친구들로부터 신랑의 고백을 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들었다. 정작 은결은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하지만 신랑이 준비해 놓았던 비장의 무기 앞에서 신부도 끝낸 기쁨의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신부 친구들이 축가를 부를 때였다. 1절이 끝난 뒤 윤경이 느닷없이 마이크를 신랑에게 넘겼고, 신랑이 노래를 이어받아 2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사위가 혼자 카페에 갔다 온다며 집을 나서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몰래 신부 친구들과 만나 축가 연습을 하고 온 것이었다. 신랑의 반전 서프라이즈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노랫말을 들으며 은결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신부 아버지 덕담 순서가 되었을 때 K의 마음엔 고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동안 하루에 몇 번씩 원고를 핸드폰으로 녹음하며 연습해 왔다. K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뒤 보완할 점을 고치며 계속 연습해 왔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K는 원고를 보지 않고도 입에서 술술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어서 신부 아버님이 신랑 신부에게 덕담을 들려주시겠습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났을 때 K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단상 앞에서 돌아서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드린 뒤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과 사위를 본 순간 K의 얼굴에서 저절로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저는 신부의 아버지로 덕담을 하러 나왔습니다만, 사실 이 젊은 부부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두 사람에게 배울 게 더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딸과 사위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마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객들이 집중하며 K의 말을 듣고 있는 게 느껴졌다. 특히 신랑 측 하객들은 K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아시겠지만, 전재민 군과 손은결 양은 1년 전 호주에 있는 상태에서 줌으로 결혼식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사위와 저의 공통점 3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아주 인상적이고 충격적이어서 아마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하객들의 답을 잠시 기다린 뒤 K가 덕담을 이어갔다.

  “네. 그건 바로 사위와 제가 어렸을 때 엉덩이 주사를 맞다가 공통적으로 바지를 벗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끝까지 다 벗었다는 것이었지요.”

  이때 신랑 측 하객들을 중심으로 크게 웃음이 터졌다. 일단 한 방은 터트린 셈이었다. 사위가 장인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걸 보고 행복감을 느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 뒤 K가 말했다.

  “제 사위 전재민 군은 참 칭찬할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큰소리 내는 일이 없고, 시종일관 다정하고 다감한 남자입니다. 신부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사위에게 어울리는 단어를 찾는다면 ‘신실함’이라는 말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제 사위가 저보다 더 착하고 성실성도 뛰어나고 신앙심도 깊고 준비성도 철저합니다.”

  사위에 대해 과하다 할 수 있는 칭찬을 쌓아 올린 건 다음 한 방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외모는 제가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예상 못했던 반전에 하객들 사이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K가 딸을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입니다. 신부가 저를 노려보고 있네요. 정정하겠습니다. 제 사위가 외모도 저보다 훨씬 멋지고 훌륭합니다. 저보가 키도 더 큰 것 같습니다.”

  이 말에 가장 큰 웃음이 터졌다. 사위가 K보다 6~7센티미터 적었기 때문이었다. 딸과 사위도 즐겁게 웃고 있었다. 덕담은 K가 예상했던 시나리오대로 정확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하, 제 딸은 지금 저를 째려보지 않고 즐겁게 웃고 있습니다.”


  K의 덕담은 여유 있게 계속 이어졌다. 딸과 사위에게 노예가 되고 싶다는 마음과 사위의 알라딘 지니 같은 모습에 대한 이야기 등을 한 뒤 그는 덕담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전재민 군과 손은결 양은 저에게 사랑하는 기쁨을 가르쳐 준 선생님들입니다. 제 딸이 되어 주고 제 사위가 되어 주어 참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끝으로 딸이 이토록 사랑스운 신부로 성장하는 일에 팔할 이상의 역할을 해온 사랑하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담을 마친 순간 하객들이 큰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K의 생애에 이보다 더 뜨거운 찬사를 받은 일은 없었다. 나중에 K의 아내는 너무 길었던 덕담이 끝난 것에 환호를 보낸 것이었다고 말했지만 K는 그 말을 끝까지 믿지 않기로 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아내의 절친인 정 집사님이 달려와 K에게 말했다.

  “나 신부 아버지 덕담이 듣고 싶어서 왔어요. 역시 실망을 주지 않으시네요. 너무 좋았어요.”

  신부 친구 세은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밌는 덕담이었다고 K에게 말해주었다.     

  예식을 마친 뒤 K 부부는 직원이 마련해 놓은 부모님 식탁에서 앉아 한우 갈비탕을 먹었다. K는 한우의 맑고 진한 국물 맛이 하루 동안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걸 느꼈다. 육질도 너무 부드러워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K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인생에서 요리를 만난 것에 큰 감사를 느꼈다. 요리를 할 줄 몰랐다면 이토록 성공적인 덕담을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음식을 만들어 딸과 사위에게 먹여보지 않았다면 그는 사랑을 주는 기쁨을 이만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덕담의 내용도 이보다 밋밋하고 평이했을 터였다. 결혼식 내내 그가 느꼈던 충만한 기쁨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K에게 요리는 사랑을 낳는 행위이자 삶의 기쁨으로 안내하는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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