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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병일 Mar 16. 2024

5. 잡채, 예비 며느리와의 첫 명절 식탁을 빛내주다

  

           

  아내가 호주 딸네에 가 있는 동안 K는 추석을 대부분 혼자 지냈다. 아들은 분가한 임대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코로나에 걸리셨기 때문이었다. 찾아오지 말라는 어머니에게 K는 녹두삼계죽을 만들어가겠다고 했다. 아들 커플은 추석 다음 날 오기로 했다.


  추석 전날 K는 재래시장에서 간촐하게 장을 봐왔다. 어머니를 위해선 토종닭과 인삼 한 뿌리, 삼계탕용 한약재, 녹두 1킬로그램을 샀고, 배와 포도도 샀다. 이틀 뒤 일요일에 찾아오기로 한 아들 커플을 위해선 삼겹살과 앞다리살, 쌈채소, 무, 배추 등을 샀다. 아내가 떠나기 전 해두었던 반찬들이 똑 떨어진 상태였다.


  예비 며느리가 온다고 하니 K는 뭐라도 준비를 하게 됐다. 메인메뉴는 아들 커플이 좋아하는 짬뽕과 양배추돼지고기볶음, 잡채를 만들기로 했다. 한결과 서진을 위해 겉절이와 무생채, 깍두기도 만들 계획이었다. 문제는 깐 쪽파가 없다는 것이었다. 큰 마트 두 곳 다 깐 쪽파가 떨어져 할 수 없이 다듬어지지 않은 쪽파를 한 덩이 샀다.     



  추석날 오후에 K는 두 시간 동안 녹두삼계죽을 만들었다. 토종닭에 마늘과 인삼, 약재를 넣고 푹 끓였다. 다른 냄비에는 닭국물로 녹두와 찹쌀을 끓여 죽을 만들었다. K는 삼계탕과 녹두죽을 큰 통 두 개에 담아 어머니가 계신 백운호수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마스크 쓴 어머니를 만난 K는 녹두삼계죽과 과일 등속을 전해드리고 돌아왔다. 원래는 하룻밤 자고 더 맛있는 걸 해드리려고 했는데 어머니의 코로나 감염 때문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 즈음 집으로 돌아온 K는 아시안게임 축구 경기를 보며 쪽파를 깠다. 쪽파 한 단을 까는 데 두 시간이 꼬박 걸렸다.          


  다음 날 K는 요리책을 보고 겉절이와 무생채, 깍두기를 만들었다. 깍두기는 소금을 넣고 두 시간을 절였고, 겉절이는 한 시간 동안 절였다. 주로 멸치액젓으로 간을 했다. 처음 만든 것치곤 맛이 제법 괜찮았다. 쪽파가 알맞게 들어가 맛을 살려주었다.     



  추석날 오전에 K는 아들 커플을 맞을 음식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날 요리책을 보다 잡채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던 게 분주함의 원인이었다. 잡채는 결코 만만하게 볼 요리가 아니었다. K가 그동안 만든 요리 중 가장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소고기에 간장 간을 해서 볶고, 당면도 간을 해서 볶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당근과 표고버섯, 목이버섯, 양파 등 야채를 볶느라 또 시간이 걸렸다. 시금치도 끓인 물에 데쳐야 했다. 마지막으로 그 모든 걸 커다란 양푼에 담아 다시 양념을 해서 버무렸다.


  그러는 동안 한 시간 반 가까이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곧 아들 커플이 올 시간이었다. K는 짬뽕을 만들면서 동시에 양배추 돼지고기볶음을 만들었다. 시간에 쫓기며 동시 요리를 하다 보니 양배추 돼지고기볶음을 태우고 말았다. 그래도 맛은 괜찮았다.     


  다행히 아들 커플이 십 분 정도 늦게 와주었다. 한결은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만들어 온 소갈비찜을 웍에 덜어 데웠다. 그런 뒤 K가 전날 사두었던 전을 능숙하게 프라이팬으로 볶았다. 예비 며느리는 상 차리는 걸 도왔다.


  잠시 뒤 소갈비찜과 양배추 돼지고기볶음, 짬뽕, 잡채, 겉절이, 무생채, 깍두기 등으로 식탁이 차려졌다. 한결과 서진은 명절 분위기가 난다며 무척 좋아했다. 아들이 사진을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곧 K의 아내와 딸이 맛있겠다며 부럽다는 카톡을 올렸다.     


  맛있는 음식을 행복하게 먹으며 대화를 하다 보니 이야기가 풍성해졌다. 주로 서진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즐겁게 풀어놓았다. 며칠 전 물리치료실 부팀장 커플을 집으로 초대했다고 했다. 부팀장은 아들이 입사했을 때 중요한 조언을 해주며 옆에서 잘 챙겨준 선배였다. 부팀장의 부인도 물리치료사여서 병원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때 서진은 이전에 한결로부터 병원과 물리치료실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없어서 소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 만남 후 서진은 아들에게 소외되었던 느낌을 표현한 뒤 “물리치료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 다음엔 나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한결은 퇴근 후 서진에게 하루 동안 물리치료실에서 겪은 일들을 잘 풀어놓는다고 했다.     


  아들은 열 명이 넘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와서 심신이 지친 날은 서진에게 이렇게 부탁한다고 했다.

  “있잖아. 나 십 분만 쉬게 해줘. 소파에서 눈감고 누워 있을게.”

  서진은 사랑스러운 새처럼 쉴 새 없이 수다를 노래하는 스타일이었다. 한결은 지쳐 있을 땐 들어주는 일이 버겁다고 했다. 아들이 말을 듣고 K가 말했다.

  “우리가 말을 할 땐 쾌락을 느끼는 도파민이 분비된대. 상대 말을 들어줄 땐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분비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꽤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야.”

  아들은 십 분 정도 누워 있다가 기력을 회복한 뒤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녁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날 K는 서진의 쉬지 않는 수다에 조금 지치는 걸 느꼈다. 잡채에 돼지고기, 짬뽕을 동시에 준비하느라 에너지가 떨어진 상태에서 들어주다 보니 힘이 드는 게 느껴졌다. 물론 예비 시아버지에게 친정엄마에게 하듯 속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는 서진이 예쁘고 고마웠다. 하지만 힘이 드는 건 힘이 드는 거였다.     


  서진은 몇 달 전 들어간 직장에서 정규직이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주었다. 공감력이 뛰어나고 성실함까지 갖춘 서진에게 상사들도 능력과 신뢰가 느껴졌을 터였다.

  서진은 한결과 건강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K는 비폭력대화를 배운 자신보다 서진의 소통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느꼈다.


  서진이 어렸을 적 아버지와 수 년 간 똑같은 장난을 쳤던 이야기를 듣고 K는 큰 감동을 받았다. 서진은 아홉 살 때부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셨을 때 서랍장 뒤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놀래키는 장난을 쳤다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크게 놀라주셨다고 한다. K가 웃으며 말했다.

  “난 서진이가 그 장난을 몇 살쯤 그만뒀을지 알 것 같은데? 한 열두 살?”

  서진은 정말 그때쯤 그만둔 거 같다며 놀라워했다.

  “그 나이부터 제 몸이 더 이상 서랍장에 숨겨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서진은 그때까지도 아버지가 진짜 놀라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K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산타클로스하고 비슷한 거 아닐까? 아이들이 양말을 머리맡에 놓고 자면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넣고 간다는 걸 더 이상 안 믿는 나이가 있잖아. 한결이도 아마 열두 살 즈음부터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부모님이 넣어 놓는 거라는 걸 알았던 것 같은데?”

  한결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K는 서진 아버님이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열두 살이 되도록 한번도 빠짐없이 리얼하게 놀라는 연기를 해주셨다니! K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매일 놀랄 준비를 하며 반겨주는 딸이 기다리는 집이었기에 그는 집에 들어설 때마다 벅찬 행복감을 느꼈을 터였다.     


  서진은 K의 가정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듯했다. 첫째인 오빠는 자주 혼나고 매를 맞았지만 둘째인 서진은 귀염과 사랑만 받으면서 자라왔다고 했다. K의 집이 꼭 그랬다.

  서진의 오빠는 어머니와 특히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어머니와 아들은 곧잘 충돌한 듯했다. 서진은 오빠가 부모님에게 함부로 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속상했다고 한다. 한번은 오빠가 기거하는 집에 가서 함께 자던 날 눈물을 쏟으며 부모님에게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로 오빠가 조금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K는 자신의 결혼 전 딸처럼 서진도 가족을 단단히 결속시켜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들이 사랑이 넘치는 파트너와 연결된 것에 대해 K는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날 서진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다. 과일을 먹고 난 뒤 K가 자리를 정리하며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자고 말해야 했을 정도였다. 서진은 이번에도 설거지를 하려고 했다. 서진을 말리며 K가 말했다.

  “우리 집은 손님에게 설거지 안 시켜.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서진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K의 말에 따랐다.


  한결과 집을 나서던 서진이 “아버님, 어머니가 오시기 전에 한 번 더 올까요?”라고 물었다. 홀로 손님 맞는 일이 기쁘면서 고단하기도 했던 K가 웃으며 예비 며느리에게 말했다.

  “엄마 오면 같이 모이는 게 좋지 않을까?”

  K의 말에 서진은 “그게 좋겠어요” 하며 환하게 웃었다. K는 서진이 또 오고 싶다고 말해주어 기뻤다. 친정엄마 같은 시아버지가 되는 게 꿈이었으므로.      


  아들 커플이 돌아간 뒤 설거지를 하면서 K는 홀가분함을 느꼈다. 마음이 가장 가볍고 편안해지고 뿌듯해지는 상태, ‘홀가분’이었다. K는 아침에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인생에서 유일한 불행은 나이들수록 현명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세상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곳”이면서 동시에 “영적 성장을 위한 완벽한 곳”이라고 말했다. 한계가 있는 물질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별에서 성장을 이뤄나갈 수 있다고 한다. 영의 세계는 한계가 없기는 곳이기 때문에 성장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K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예비 며느리에 대한 사랑의 기원을 더듬어 보았다. 원천은 K의 딸 은결에 대한 사랑이었다. 딸에게 기꺼이 주길 원했던 조건 없는 사랑을 사위에게도 주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예비 며느리에게도 주게 된 것이었다. 이 홀가분함과 기쁨 역시 사랑하는 딸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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