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괜찮아>

by DDOBOM

'야, 너두'


헬스장 오는 것까지가 운동처럼 느껴지는 여름날이었다. 헬스장 건물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자 익숙한 영어 강의 광고였다. '야, 너두 영어 잘할 수 있어.'를 줄인 광고 카피로 익살스러운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모델이라 유명해진 광고였다.


밝은 오렌지색의 짧고 강렬한 문구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할 수 있어' 라고 뒤따라오는 영상 속 카피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카피로 채택됐던 걸까?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광고 문구가 양 옆으로 사라졌다.


헬스장 출석 인증을 했다. 레깅스와 운동용 상의를 입었다. 업무 시간을 제외한 다른 시간에 스스로를 위해서 세웠던 계획은 해낼 수 없었던 숱한 날들이 떠올랐다. 모니터 너머의 누군가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하느라, 부탁하느라, 했던 업무의 수정 요청을 받고 거절 또는 수락하느라 '나도' 해내고 싶었던 계획은 12시를 넘어가는 초침 소리를 따라 부스러져갔다.


'하긴, 저녁도 겨우 먹었었는데, 뭘 더 하고 잤겠냐아...'


매트로 올라와 찌뿌둥한 몸을 영상 속 선생님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풀었다.




도서관에 도착해 수험서를 한 장씩, 한 장씩 넘겼다. 한 페이지가 최소 5kg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안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오늘 100장은 해야 하는데.'


매일 보아도 당최 줄지 않는 양에 매일같이 압도 당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서주긴 싫었다. 그래서 꽤 자주 도서관이 문 닫는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좌석표를 기계에 댔다.


삑-


옆에 쓰레기통에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살짝 휜 C컬의 좌석표가 날날하게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날의 좌석표를 집으로 가져와 이미 책상에 두툼하게 쌓여있는 좌석표 위에 내려놓았다. 성실했다는 자기 위안인지, 진척이 없는 답답함인지 모를 오묘한 마음이 한 장 더 두꺼워졌다.


씻고 나니까 출발지에서 '집에 가면, 00을 해야지.'의 결심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할 힘이 없이 없었다. 머리를 말렸다. 거울 앞에 비친 모습에선 이제는 어떻게 봐도 어린 개체로서의 생기는 없어 보였다.


잠자리에 누워 불을 끄고 멍하니 천장을 봤다. 세상과 단절된 채, 책 속의 지식을 머리에 새겨 넣으려고 아등바등했을 그 아이들의 속은 대체 뭐로 채워져 있었길래, 이 힘든 것을 몇 년 동안 어떻게 했던 걸까? 오래 공부를 했던 친구들이 존경스러워졌다.





한여름의 열람실은 인간의 열기뿐만 아니라 노트북의 열기도 거뜬하다. 그래서 꾸준히 뜨거운 노트북과는 달리 냉방에 절여진 인간의 몸은 한 시간에 한 번씩은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두뇌부터 살얼음이 끼기 마련이다. 차가워진 손가락 끝이 더는 펜을 꽉 쥘 수 없는 걸 신호로 잠시 밖으로 나와 도서관 정원 벤치에 벌러덩, 드러누워버렸다. 여름 하늘답지 않게 높고 푸르렀다. 떠 있는 구름이 자기 크기 따위는 상관 않고 스르르르 옆으로 옆으로 움직였다.


'움직인다...'


어디로 나아가고 있긴 한 걸까? 뇌는 두 쪽이었지만, 들어가야 할 정보의 양은 네 쪽도 훌쩍 넘었다. 그리고 압축 기술은 썩 좋지 않았다. 에러 창의 매번 뜨는 오래된 컴퓨터가 내 목 위에 있었다. 설상가상 그 와중에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단 걸 허리와 어깨는 착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껏 아무 느낌이 없었던 그들은 이제 더 꿔줄 건강이 없으니 채워 넣으라는 청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시도때도 없이 해대고 있었다.


'상승한다는 느낌이 들면, 움직인다는 기분이 들 텐데.'


착실하게 절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차마 움직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움직인다'보다 '끌려간다'에 더 가까웠다. 누운 등짝이 벤치에 눌어붙는 듯했다. 쓸데없는 상념이 구름 따라가는 걸 보니 몸이 다 녹은 모양이었다.


'아, 몰라. 이제 그만 열람실 들어가자.'


평소보다 조금 이른 저녁 10시, 허리가 더는 못 버티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도서관 안내방송을 듣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틀림없이.


장대비가 내리쳤다. 가서 다 볼 수도 없을 수험서를 주섬주섬 챙겨서 가방에 넣고,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챙기고, 우산까지 들고 가려다 눈이 까마득해지는 순간, 아버지가 나서주셨다.

"나가는 길에 태워다 줄게. 올 땐 알아서 와."

"감사합니다."

횡재는, 장날이라야 있는 법이다.




종소리가 울리고, 시험지가 걷히고, 구름도 걷혀있었다. 오전 내내 내린 비를 다시 하늘로 걷어가느라 공기는 꽤 습했지만, 아침과는 다른 쾌청한 하늘에 결과가 어떻든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허기가 졌다. 코르셋에 꽉 조여있던 갈비뼈가 풀리고 나도 모르게 솟아있던 어깨가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며칠 뒤, 가채점을 했다. 합격자 발표가 나지 않았지만 불합격이었다. 슬프진 않았다.


'어른이 된 걸까?'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작년과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 과목씩 대조해 봤다.


'엄청 정성스럽게 가꿨던 화초는 시들시들한데 밖에서 대충 비 맞고 자란 잔디가 더 푸릇푸릇한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은 주요 과목에 괜히 섭섭해졌다. 차라리 주요 과목이 좀 더 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교복 입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주요 과목은 참 애를 먹인다. 그렇다고 또 하나도 안 오른 건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애매하게 오른 성적 위로 선택의 기로도 애매하게 솟아났다.




고민을 해서 고민이 없어지면 고민이 아니게?


머리 싸매고 있느니, 한동안 도서관 가듯 헬스장을 거의 매일 갔고, 아르바이트를 갔고, 친구들을 만났다.


묘하게 정체된 기분에 집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정체되어 있다는 건 대체 뭘까. 회사를 다녔을 때도,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 너무 싫었는데...'


공부를 해도, 회사를 다녀도 정체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진전하고 싶어서 선택한 공부에 발목을 잡힌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단호한 긍정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니야.'


버티고 있다는 것, 쓸려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아가고 있는 거였다.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이뤄내지 못해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지루함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을 때 시간은 분명 인내의 끈을 엮어 의연해질 수 있는 지점으로 보냈다.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흐늘하게 벤치에 널브러져 있다가 다시 추운 열람실로 들어갔던 여름이, 혼자 천장을 보며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며 조용히 베개를 적시던 5월의 어느 날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있던 하루를 아까워했던 밤들이 밤공기에 옅어져갔다.


'아무래도 좋아. 뭘 하든, 또 할 수 있어.'


어느새 습기가 사라진 초가을이 선선한 격려를 어깨를 다독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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