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달라진 '장수'의 개념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by 방구석 관찰자

내 시부모님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선량한 농민이셨다.

남편이 4형제 중 막내라, 늦둥이에 가까웠다. 시아버님은 1937년생, 시어머님은 1936년생이고, 지금 젊은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제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시아버님은 체구는 작으셨지만, 강단이 대단하신 분으로, 연세가 80세가 넘어가면서는 병원에 절대 가지 않으셨다. (원래 젊은 시절에도 병원을 싫어해서 가족들 애를 태우기도 했으니, 솔직히 말하자면, 강단이 대단한 것보다는 고집이 센 것에 가깝긴 하다)


당신 몸 안이 어떻게 되든, 이미 죽을 때 가까워서 병원에 가 봤자 뭐 하겠냐 싶은 마음일 걸로, 남은 가족들은 멋대로 해석하기도 했다. 시아버님은 당신 신체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으셨고, 당연히 우리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매일 평소 루틴대로, 아침 식사 후에 자전거를 타고 밭에 가셨고, 밭에서 곡괭이질을 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때 연세가 89세다.


그때까지도 시어머님과 두 분이 시골집에 같이 사시면서 대도시에 나와 사는 자식들이 가끔 찾아뵙고도, 일상생활에서 크게 걱정할 게 없었다. 단지, 1살 연상의 시어머니에게 계속 밭일과 논일을 강요해서, 다른 이웃집 할머니들처럼 마을회관에서 옹기종기 화투 치며 놀거나, 관광버스 타고 놀러 다니지 못해, 시어머니의 한탄과 하소연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갑자기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장례식장에서 많은 위로와 인사를 받았는데, 인사를 건네는 이들의 일부는 우리에게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건넸고,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장례식장을 떠났다. 장례 자체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남편 역시, 장례식 내내 참담한 표정을 하고 슬퍼하였으나,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가 된 후에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의 소회 중 하나가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수많은 지인이 죽음의 문턱에서 오늘, 내일 하시는 부모님의 간병에 매달리고 있다. 수술하기에는 부모님이 너무 고령이라, 그저 생명 유지를 위한 장치들이 하나, 둘씩 더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많았다. 빨리 돌아가시길 바라는 마음은 사회적으로 용인받을 수 없는 불효가 확실한데, 긴 간병에 지친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일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힘든 과정 없이, 충분히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었고, 살아생전에 어떤 불화가 있었든,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과 그리움을 가지게 되었다.


의학의 발전으로 무병장수는 물론, 유병장수도 가능하다. 우리는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겉모습은 확실히 깜짝 놀랄 정도로 젊어지고, 몸속 장기의 모습은 병원에 가면 언제든지 관찰할 수 있다. 병원에서 더 이상 할 치료가 없는 경우는 정말 죽음을 목전에 둔 경우일 뿐이다.


시아버님은 차남임에도, 증조 시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시아버님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증조 시할머니를 직접 모셔야 했던 시어머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격이 강한 증조 시할머니가 장수하셔서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증조 시할머니는 61세에 돌아가셨다. 증조 시할아버지는 그보다 이른 59세에 돌아가셨다. 장수의 개념이 이렇듯 두 세대가 확연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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