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막내인 남편은 어머니가 치매 증상이 발현되자,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어머니의 요양원 입소를 위한 요양 등급을 받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갔다. 시골은 연로한 노인들이 많아 도시보다 요양원 입소를 위한 등급판정이 매우 까다로웠다. 생업에 지장을 받으면서까지 시골 본가를 드나들며,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어머니는 상태에 맞는 요양 등급을 받으셨고, 본가 근처의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때 이미 치매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지만, 혼자 생활할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아신 것 같았다. 막내아들의 말에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입소하셨는데, 그것이 더욱 막내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뒤에 요양원에서 보내오는 알림에 의하면, 어머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에도 잘 참여하시고, 돌봐주는 요양보호사와도 원만하게 잘 지내며 요양원 생활에 잘 적응하시는 걸로 보였다.
사실, 요양원 면회는 미리 시간을 예약해야 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잠깐 면회하는 우리들의 눈에 어머님의 상태는 요양원에 잘 적응한 걸로 보인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깨끗하게 세탁된 옷 등, 가족들이 보기에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로 꽃단장(?)을 하고 나오시기 마련이다. 배변 패드의 관리상태가 어떤지, 엉덩이가 짓물렀는지 들춰볼 수 없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평소의 생활상태는 사실 정확히 알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직접 모실 수 없는 우리가 정성과 책임을 다하는 요양원을 상대로, 확실한 증거 없이 불만과 의심을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는 자식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다.
한 번은 요양원에서 갑자기 이마를 다쳐서 몇 바늘을 꿰매는 대참사가 벌어졌는데, 우리는 당연히 요양원의 책임을 거론하며 분노했지만, 요양원 측은 어머님이 밤마다 소리를 지르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같이 입소한 룸메이트들과 요양보호사들을 힘들게 했다는 기록을 제시했다. 안전을 위해 취침 시간에는 침대와 몸을 묶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철저히 을의 입장인 우리로서는 속이 상했지만,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인간의 늙음이라는 게 이토록 슬픈 것인가,라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에 무척 고통스러웠다.
어머님은 요양원에 입소하고 얼마 뒤, 막내아들을 못 알아보셨다. 그러나, 깨끗이 단장하고 휠체어를 탄 상태로 면회 장소에 나오는 어머님은 지긋이 막내아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셨다. 우리가 헤어질 때쯤이면 무언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는 집에 오는 길인 한적한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많이 울었다.
이쯤 되면, 밭에서 곡괭이질을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문 사례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부모는 장수 시대에 필수적인 각종 의료 혜택 속에 수명이 길어졌지만, 부모와 자식 양쪽 모두에게 행복한 말년의 기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내 시어머님처럼 요양원에서 온전한 자신이 아닌 상태로 인간의 기본 생리 현상을 남에게 의탁해 살아야 하는 삶도 있고, 요양원 입소를 거부하며 자식과 마찰을 빚고 고집쟁이 부모로 애증의 대상이 되는 삶도 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에 대한 윤리적 도리는 부양에 대한 부담과 대립하게 되면서 우리에게 죄책감으로 돌변한다. 부모의 장수는 자식인 우리 세대에게 축복인가, 재앙인가? 부모가 장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장례식장에서 오히려 부담감을 내려놓고 미래의 희망을 느끼는 자식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부모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 눈물겨운 애통함이 섞인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자녀가 얼마나 될까? 자식 세대는 끝없이 윤리적 딜레마에 봉착하고, 자신에게 질문하며, 자신을 검증하게 된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정해진 절차이고, 누구나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때가 올 텐데, 왜 살아있음이 이토록 힘들게 복잡한 마음을 갖게 하는가? 처음으로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우리는 부모의 장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실로 어렵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