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 멀고도 힘든 효도의 길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by 방구석 관찰자

내가 신혼일 때, 시어머니는 내게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내가 자식들 키우고 교육하느라 일평생을 허리가 휘게 일했으니, 나에겐 자식이 보험이지. ”


이 말의 직접적 대상은 시어머니가 낳은 4형제였지만,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는 일면식도 없었고 그 어떤 도움도 받은 적이 없는 어머니의 말씀은 나도 그 보험 안에 있다는 것이고 이제 막 결혼한 나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 단순한 말 뒤에 자신은 자식들의 양육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부었으니, 자, 이제 너희(특히 딸과 며느리 등 간병 능력이 탁월한 여성들이 대상이다)가 나를 돌봐줄 차례야,라는 어머니의 단단한 기대와 믿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시아주버님들은 이미 노인의 기색이 완연했다. 나의 불길한 예감대로, 시부모님의 진정한 보험은 가장 나이가 어린 늦둥이 막내, 남편과 나였다.

남편은 위로 3명의 형이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시골에서 4명의 아들을 낳은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그런 사고방식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이었다. 지금부터 먼 농경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많은 수의 자식을 낳을수록 가정의 노동력에 보탬이 될 뿐 아니라, 부모가 더 이상 노동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그 자식들이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당연했다. 시어머니는 단순한 자식이 아니라, ‘아들’이란 가부장 사회의 핵심 노동력을 낳았기 때문에, 자식들이 장성하고 나면, 응당, 예를 갖춘 부양을 받을 것을 예상했다.


남편의 맏형은 어머니가 19세에 낳았다. 막상 시부모님이 부양받을 시기 즈음에는 장남을 비롯해, 남편의 형들도 줄줄이 은퇴하여,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식은 막내와 막내며느리였다. 남편의 형들은 이런저런 사유(은퇴 후 수입의 감소, 나도 늙었다는 불평, 부부간의 불화 등)로 시부모님이 기대하는 효도를 다 하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일한다는 명목 아래, 실질적인 금전적 부양은 은퇴한 형들보다 많이 감당했다. 경제적인 부분만을 놓고 보면 우리 부부가 실질적 부양 주체고 실질적 부양 주체를 K-장남이라고 부른다면 우리가 명백한 K-장남이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경제적인 지원만 놓고 봤을 때, 부모님이 가장 경제 상황이 좋았을 중년의 시기에는 형들에게 돈이며, 논밭이며, 많은 금전적 지원을 하셨다. 남편은 세상모르고 옆집 형들과 동네 계곡에서 개구리 잡고 자전거로 온 동네를 누빌 때다. 물론, 남편의 형들이 부모님의 지원에 합당한 결과를 내서 가정에 보탬이 되었는가는 남편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밝히지 않겠다. 막상, 남편이 학업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는 가세가 기울고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남편에게 가장 기본적 학비 외에는 거의 지원하지 못하셨다. 남편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자취를 시작했는데, 대학 졸업장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지하층에 빗물이 들이치고, 당장 잠을 잘 방이 없어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던 얘기 등 부모님이나, 남편이나,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남편과 나는 각자의 본가에서 온갖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 해결사 담당이었다. 양쪽에서 모두 우리 부부에게 말한다.

“내가 너니까 얘기한다, 내가 너 아니면 어디에 가서 이런 서운한 일을 얘기하겠니?”

“너희만 바라보고 힘들게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누가 이 억울함을 알겠니?”

입을 앙다물고 딴짓하며 듣는 척은 하지만, 속에서 열불이 난다.

‘아니, 듣는 나는 어쩌라고요? ’

사소한 말동무 역할뿐 아니라, 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택배로 보낸다든지, 자질구레한 관청의 서류 업무라든지, 실질적인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했다. 양가 모두 혼자 병원에 진료받으러 가는 것은, 상당히 애매한 난이도의 일이어서(굳이 부모님만 가면 못 갈 일은 아닌데, 복잡한 종합병원 안에서 이리저리 안내에 따라 이동하는 것이 매끄럽지는 않을 것이 예견되는 그런 애매함), 우리는 각자의 부모님 병원에 동행하기 위해 회사에 눈치를 보며 휴가를 내야 했고, 우리는 앞장서서 부모님을 모시고 종합병원에 다녔다. 부모님이 병원을 찾아갈 수 없을 정도로 길을 못 찾는다거나, 거동이 불편하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홀로 병원에 오는 노인들을 안쓰럽게 보며, 자신들의 감정을 투영했고, 우리가 부축해서 이리저리 진료과를 이동하고, 약을 타 오고 하는 과정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부양과 효도의 최전선에서 나름대로 할 도리를 다하려 애썼다.

자신의 노화를 객관적으로 수용하고, 자식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애쓰며 노후를 보내는 부모들도 있다. 될 수 있으면, 오랜만에 보는 자녀들에게 긍정적인 이야기만 하고, 독립적으로 일상을 보내려는 분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경제적인 면과 크게 상관없다. 돈이 많이 있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고, 품격 있는 노후를 보내고자 스스로가 노력한다는 것이다. 내 친구 D의 아버지가 그런 경우다. D의 어머니는 일찍 병으로 돌아가셨다. D의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조그만 아파트의 경비 일을 하셨으며, 이미 집안일도 체득하여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나이와 체력의 한계로 어쩔 수 없이 은퇴해야 하는 시점부터 오전에는 동네 뒷산에 오르고, 오후에는 기원에 가서 바둑을 두었다. 집에 들어오면서 동네 슈퍼마켓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고, 저녁 식사도 간단히 만들고 집안일이 끝나면 이른 취침에 들어간다. 한 달에 한두 번, 자녀들과 외식할 때도, 자녀들이 비용을 부담하는 것에 대해 멋쩍어하고 대신 손주들에게 적은 액수지만 용돈을 쥐여 주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진부한 말 대신 즐겁게 살아라 하며 위트 있게 만남을 마무리한다.


자녀 교육만 끝나면, 하면서 암묵적인 결승선을 향해 열심히 달렸고, 틈틈이 부모님을 돌봐드리기도 하면서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는데, 이제는 내 부축 없이는 병원에 가지 못하는 부모님이 날 기다리고 있다. 물론,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하기 위해 스마트폰에 저절로 적응하신 어르신들도 많고, 동영상 플랫폼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인터넷 쇼핑과 키오스크의 세상에서 이미 도태되어 버린 다수의 부모님은 우리의 도움 없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다. 우리는 또 다른 터널이 시작되는 것임을 깨닫고 낭패감에 휩싸인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예전처럼 집에서 기르던 소를 팔거나, 월급봉투에서 생활비와 학원비를 내놓는 것만으로 자식을 부양했다고 할 수 없다. 내 자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나의 모든 자원들이 투입되며 헌신해야 하는 시대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는 예전 자신의 부모가 그러했듯, 이제는 자식에게 투자한 모든 희생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바뀐 세상은 수용하지만, 자신들이 받아야 할 효도라는 보상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자식들을 키우느라 경제적, 심리적인 모든 자원을 소진해서 무릎을 꿇고 헐떡이는 우리에게 내 자식 장하다고 엄지를 추켜올리며, ‘아이고, 내 자식이 손주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네. 그건 그렇고, 삭신이 다 쑤시는데, 대학병원 좀 예약해 다오.’ 길고 긴 마라톤을 막 통과하자마자 다시 마라톤 코스가 시작되는 이 낭패감이 부도덕한 불효에서 비롯된 것인가? 새롭게 시작되는 쳇바퀴 같은 레이스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과연 비윤리적인가?

keyword
이전 11화8. 자녀교육 끝나니 부모부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