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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녀교육 끝나니 부모부양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by 방구석 관찰자

나는 내 부모님이 비교적 늦은 나이에 나를 낳으셨다. 남편은 큰형과 무려 12살 차이가 나는 확실한 늦둥이다. 그래서 우리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룬 시기는 양가 부모들이 비교적 나이가 많았다.


내 세대는 지금 젊은이들과는 확실히 다른 나이에 결혼했다. 나는 27세에 결혼했는데, 나를 포함해서 내 친구들은 모두 늦어도 28세 전후에 결혼했다. 내가 결혼하던 2001년에는, 아홉수라는 불길한 용어가 분명히 있었고, 30세가 넘으면 노처녀 딱지가 붙었다. 2005년에 방영되었던 유명 TV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은 드라마 시놉시스에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않은 29세의 노처녀 파티시에’라고 버젓이 올라와 있다. 격세지감의 올바른 예이다. 나는 30세에 첫째를 낳았고, 34세에 둘째를 낳았다. 결혼하자마자 아기를 가진 것은 아니어서, 늦게 출산한 편에 속했다.


결혼 전, 나는 생명체를 낳아서 길러야 하는 책임감에 압도되어 남편과 딩크(double income, no kids)가 되기로 약속하고 결혼했다. 나는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생명체를 낳아 양육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당시 남편은 무슨 생각인지 순순히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나서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온 것처럼,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고 목숨을 걸어야 했을 정도로 순탄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건강한 첫째를 출산했다. 첫째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으니, 부모 손이 가장 필요한 시기의 급한 불은 끈 셈이고, 둘째는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되니, 한참 입시를 준비하는 중이다. 나는 내 나이대에 비해서 2~3년 늦게 출산했고, 양가 부모님들이 나와 남편을 늦게 출산하셨으니, 내 나이 또래들은 아마 자녀들이 모두 얼추 성인의 문턱을 넘고 있을 걸로 예상한다.


자녀 교육에 열성인 우리나라의 분위기로 볼 때, 내 또래 세대는 정말 정신없이 20여 년을 보냈을 것이다. 부럽게도 처음부터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고 시작한 부부들도 많았겠지만, 그 당시는 전반적으로 자신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일단 결혼해서 함께 부를 일구자는 분위기였다. 지금처럼, ‘준비가 완벽히 끝나면 결혼합시다.’가 아니라 ‘나이가 꽉 찼으니 결혼부터 하고 그 뒤에 천천히 집을 산다든지, 자녀를 교육하든지 합시다. 뭐, 어쨌든 그럭저럭 먹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라는 대책 없는 낭만의 시대였다.


자녀들도 열심히 키워야 했고, 응당 수반되는 돈도 많이 벌어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는 시기였다. 맞벌이였던 내 경우만 해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어지는 뺑뺑이를 돌아야 했고, 그 와중에 돈도 벌어야 해서, 직장에서 눈칫밥 먹으며 몰래 아이들과 통화하면서 원격조종 했고(그래서 내 아이들은 일찍부터 스마트폰이라는 마법의 바다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야근을 줄일까 고민하며, 근무 시간에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없이, 그날의 일은 일과 시간에 모두 마쳐야 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살았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기본적인 욕구 해결의 과제에서 벗어났지만, 대신 입시라는 끝없는 블랙홀 속에서 빙빙 도느라 정신없었다. 요즘 대학입시는 부모가 모르면 전혀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서,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처럼 1등부터 꼴등까지 줄만 세우면 내가 어느 학교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두꺼운 안내서 따위는 없다. 모든 게 단순하고 투명했던 시대에서 복잡하고 불투명한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자녀의 대입 실패는 부모의 정보 수집 능력의 실패와 동의어인 시대에, 자녀에게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쁜 와중에도 학원 설명회나, 학교 설명회를 쫓아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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