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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이가 되어버린 부모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by 방구석 관찰자

나이가 들수록 아이가 된다는 옛말이 있지만, 진짜 아이가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과 연로한 부모가 내게만 의존하는 것은 명백히 느낌이 다르다. ‘내리사랑’이란 말도 있듯이, 사랑은 흐르는 물처럼 아래로만 흐르고, 위로 다시 솟구치기는 정말 어렵다는 것을 현명한 우리의 조상들은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효를 진심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온갖 경구들(삼년상을 위시해서)이 각종 경전에 인용되어 있고 유교라는 이념으로도 정립되어 나같이 정신이 해이한 후손들을 강제적으로 끊임없이 일깨운다. 경제적, 심리적으로 부모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가르침은 그만큼 지키기 힘들다는 말과 같다.


어느 날, 고등학생 딸에게 물었다.

“아기는 트림만 해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구경하며 아유, 귀여워~ 하고 외치는데, 노인이 트림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겠지? 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예쁜 짓만 하고, 노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못난 짓만 하게 되는 현실이 너무 아이러니해.”

“귀여운 노인이 되면 되지.”

“어떻게 귀여운 노인이 될 수 있지?”

“돈이 많으면 될 수 있어.”

딸은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나도 될 수만 있다면 귀여운 노인이 되고 싶지만, 사이버 머니가 있는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부모님이 기대하는 부양과 효도의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에 상관없이, 부모님의 하소연과 한탄이 나날이 늘어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부모님은 자신들의 노화 자체도 감당하기 힘들고, 기대에 못 미치는 다른 자식들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옆집 이웃들의 한없는 자식 자랑, 손주 자랑 등에 끼지 못하는 서운함, 시기심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성숙하게 처리하는 방법에 서툴다.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처럼 ‘옆집 아들 며느리가~’로 시작하는 말은 늘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나마, 경로당이나 지역 사회의 노인 대상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는 노인들도 있지만, 그 사회에서의 위화감이란 아주 원색적이고 본능적이어서, ‘나이 어린 노인’이 ‘더 노인’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형편이다.


내 친구의 75세 어머니는 이사 간 아파트에서 말동무를 찾아 아파트 경로당을 찾았다가, 77세 선배 할머니가 과일을 씻어 내오라는 명령조의 지시를 듣고 바로 경로당에 발길을 끊었다. 오죽하면, 고급 요양원에서도 어떤 의미의 기준으로든 서열이 존재해서, ‘내가 이 나이에도 수발들어야 할 어른이 있다니, 참을 수 없군’ 하며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는 어르신들도 많다. 나의 시어머니만 해도, 시골 마을회관 할머니들의 금붙이 자랑,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 사위가, 내 며느리가 선물해 준 금붙이 (내 직계 자식이 선물한 것보다 몇 배의 효력을 발휘한다)에 속이 상해서 한동안 마을회관에 발길을 끊은 적도 있다. 그러다, 우리가 눈치껏 새 옷이라도 사 드리면, 그걸 입고 다시 마을회관에 출입을 시작하셨다.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 이런 일이 덜 할까?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 신앙생활이 목적이어야 하지만, 거기도 신 앞에 부족한 인간들이 모여 만든 세상이라, 자신의 신심을 수련하고 쌓는 활동보다는 그걸 명분으로 모인 또 하나의 사회와 서열이 형성되고, 그들 내에서 비교, 경쟁, 질투, 시기 등의 부정적인 감정의 토로들이 신앙생활을 압도한다. 게다가, 개인화된 현대 사회에서 종교를 가지는 젊은이들이 어쩔 수 없이 줄어듦에 따라, 어떤 종교든 간에 어르신들이 주 연령층이 된 지가 오래다. 새로운 바람이 유입되는 경우는 드물고, 고인 물만이 가득하여 분위기 쇄신이 어렵다. 어쩌다 젊은 사람이라도 새로 입교하면, 때는 바로 이때다 하고 신앙생활로 누리게 될 평화보다 봉사에 대한 책임감만 잔뜩 안겨주며 조직의 시스템을 알려주면서 자신은 이제 한 걸음 뒤로 빠져 있어도 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삶의 고통을 종교로 이겨보고자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 인간의 나약함만을 목도하고 실망감에 다시 현생의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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