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게다가, 갈수록 젊어지는 신체 나이, 혈관 나이가 무색하게, 우리의 뇌는 아직 장수 시대를 건강하게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신체 나이와 조화를 이루던 뇌의 나이는 갑자기 젊어진 신체 나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늙어가고 있다. 신체의 질병으로 죽어가던 예전과 달리, 신체는 건강한데 뇌가 죽어가는 알츠하이머(치매) 증상이 급증하고 있다. 한 인격으로서의 정신은 사라지고 없으나, 몸은 멀쩡하게 있는 이 부조화는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기괴한 형태의 삶이 되어 남아 있는 가족들을 아프게 한다. 이 질병의 가장 큰 비극은, 본인도 원하지 않았을 것 같은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돌봄 인력이 필요하게 되고, 이는 비용의 지출로 이어지며 가정경제에 부담이 된다.
‘긴 병에 효자 없다’지만, 효심만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무한정 들어가는 병원비와 간병비에 자신의 인내심은 매번 심판대에 오른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자녀들의 효심은 계속 시험에 든다. 전통적인 효의 개념에 당당히 반기를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순응하자니, 물심양면으로 고통이 크다.
내 친구 C는 부모 부양을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었다. 성격이 보통 아니었던 아버지는 집에 방문하는 요양보호사들과 늘 마찰을 일으켰고, 주간보호센터나, 요양원은 절대로 가지 않으려 했다. 병원에는 수시로 다녀야 했고, 집에만 있는 것을 답답해해서 늘 바깥공기를 쐬어야 했다. 그러다 치매 증상이 심해졌는데 의심과 폭력성이 동반되어 보통의 성인 여성이 제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족들이 합의해서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셨는데, 요양원에서도 난폭성이 대단하여 퇴소 처분을 받게 되었다. 받아주는 요양원이 없어서 결국은 집에서 모셔야 했는데, 문제는 누가 돌보느냐였다. 여동생이 있지만, 여동생 역시 시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C는 중요한 승진을 목전에 두고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었고 아버지를 돌보기 시작했다. 자녀들도 취업 준비기간이어서 여러 가지로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기였으나,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어 뼈아픈 아쉬움에도 퇴사를 선택했다. 아버지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돌아가시고 난 뒤, C는 드디어 쉴 수 있을까 기대했으나, 이제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조금 어렸던 시부모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도 그녀가 친정아버지를 부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부모님을 돌볼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깊은 좌절에 빠졌다.
나의 시어머니는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매우 힘들어하셨다. 어디까지나 시어머님 말씀이지만, 시아버님 살아계실 때 농사일과 집안일을 모두 감당해야 했기에, 언제나 ‘저 영감탱이 하늘로 가면, 마을회관에서 하루 종일 밥 해 먹고, 농사일, 집안일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가 멀다 하게 꽃구경만 다녀야지’ 하셨다. 그러나, 정작 시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마을회관에는 발길을 끊었고, 식사도 종지에 담은 간장에 쌀밥 정도로 단출했다. 배우자의 사망이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라더니, 아무리 영감탱이라고 부르며 원망했어도 남편의 죽음은 큰 상실감을 불러왔다. 그리고 체면을 중시하는 시골 어르신들의 특징대로 남편이 없는 과부 신세가 서러웠는지 이웃들과의 교류도 끊으셨다. 자식들이 때때로 찾아뵈면, 그때만 반짝 기운을 내시는 듯했고, 나머지 시간은 TV 앞에 이부자리 펴고 누워 하루를 보내셨다. 시어머니는 주로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몸을 가누지 못해 여기저기 부딪히고 골절상을 입으셨다.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 집안은 엉망이 되어 갔고, 시어머님의 위생 상태 역시 양호하지 않았다. 집안에서도 자주 넘어지거나 가구에 찧었으며, 한 번은 쇄골을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셨고, 한 번은 발을 헛디뎌 인대가 늘어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식사도 거르시고, 배변 실수도 잦아졌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남편은 남편대로 자주 시골을 다니며 어머니의 상태를 살폈는데,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두 달 만에 급속도로 어머니의 상태가 안 좋아져서 요양보호사나 가족의 돌봄을 넘어선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남편의 형제들은 각자의 이유로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 역시 맞벌이여서 종일 간병인이 필요했고, 시골에서만 평생을 지내시던 어머님을 도시로 무작정 모시고 올 수가 없었다. 언젠가 바쁜 농사철에 아버님의 잔소리로부터 어머님을 구조하기 위해 우리 집에서 1주일을 모신 적이 있는데, 성정이 내향적이고 소심한 면이 있으신 어머님은 집에서 TV만 보셨고, 익숙한 시골집으로 빨리 돌아가길 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