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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리 Jun 13. 2022

발렌타인 글렌버기

너 어제 우리 집에서 멜론 들고 갔니?

 1~2주의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퇴근 후 창고형 마트로 갔다. 보통 마트에서 구매하는 것은 바나나와 샐러드, 제로칼로리 음료와 같은 다이어트를 위한 식품들과 초콜릿과 감자칩과 같은 벌크업 전용 고칼로리 제품들... 쇼핑카드에 두 카테고리의 제품들을 담으면서 '이것들(저칼로리 식품들)만 먹고살 수는 없어. 가끔씩 초콜릿이랑 과자가 먹고 싶을 텐데 결국 살 거라면 여기가 제일 싸.'라든지 '나는 초콜릿을 먹으려고 샐러드를 먹는 거야. 밥도 먹고 초콜릿도 먹는 것보단 훨씬 양심적이잖아'라는 합리화를 한다. 적당히 쇼핑을 하고 굳이 계획에 없던 주류 코너로 향하는 것은 나의 마트 루틴이다. 그때 눈에 들어온 파란색 라벨의 발렌타인 글렌버기. '얼마지?' 와인 가격처럼 위스키도 그러하듯 마트마다 그리고 행사기간마다 가격차이가 많이 난다. 내가 원하는 술의 가격을 항상 체크해 두면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데려가야겠어'


 A 양은 러닝 크루(달리기 동호회)에서 알게 된 사이로 서로 운동에 관한 이야기만 나눴지 각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 SNS를 통해 그녀가 소소하게 게스트를 상대로 비스트로를 운영하는 귀여운 취미가 있다는 점만 빼고. 하루는 그녀에게 요청하여 A양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집에 들어선 순간 그녀의 비스트로가 시작되었다. 우선 손을 씻고 자리에 앉았고 근황 토크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 잔의 모히또를 웰컴 드링크를 받았다. 애플민트 잎이 비춰낸 녹색의 싱그러움에 탄산수가 만들어낸 기포의 청량함이 더해져 나를 격하게 환영해주었다. "웰컴, 웰컴!"  A양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내가 집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성품을 좋아했기 때문에 책장에 눈이 갔다. 내가 읽었던 책, 읽고 싶었던 책, 그녀의 직업을 나타내는 전문 서적 몇 권... "다 됐어. 이제 먹자!" 그녀는 간단하게 위스키와 안주 몇 종류를 내어왔는데 비주얼은 SNS에 포스팅된 레스토랑의 것과 진배없었다. 안주와 함께 그녀가 글라스에 따라주는 위스키를 쭉쭉 잘 받아 마셨다. 생각보다 잘 받아 마셔인지 A양은 곧 몇 잔의 글라스와 몇 종류의 위스키를 더 꺼내왔다. '집에 위스키가 두 병 이상 있다고...?' 아까 그녀의 책들 중 위스키 관련 책이 있는 것이 생각났다. '이 언니 진심이네...' 그리고 곧 신세계가 열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대여섯 병의 위스키를 각 글라스에 따라 이상형 월드컵처럼 위스키 월드컵을 개최했다. "이 둘 중에는 뭐가 더 나아? 이거는 민트향이 좀 나고, 이건..." 한 가지를 선택하면 A양은 다른 한 가지를 탈락시키며 새로운 후보들을 끊임없이 술장에서 꺼내왔다. 마치 화수분처럼 위스키는 계속 나왔다. 취기가 도는 상태였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한 내가 지금도 대견하다. '이 위스키 월드컵에서 1, 2위를 뽑아도 난 내일이면 기억 못 한다... 사진! 사진을 찍어야 해!' 그렇게 1위 위스키를 선발했고 나는 지하철 플랫폼에 누워있었다. "아가씨 일어나요. 이게 막차예요." 다시 정신이 든 건 새벽 내 침대에서였고 숙취에 완패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A양과 나는 와인도 마셨던 거 같다. '이 지독한 숙취는 와인의 숙취다...' 아침에 힘겹게 일어나 나에게 위스키의 세계를 보여준 A양에게 감사의 연락을 했다. A양은 집에 잘 들어갔는지 안부를 묻다가 망설이며 물었다. "너 어제 우리 집에서 멜론 들고 갔니?" A양이 아침에 일어나 집을 정리하려고 보니 멜론 반통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분명 우리가 먹은 멜론은 반통이었다. 그녀는 광란의 밤을 보냈던 우리의 모습이 떠올라 식은땀을 흘리며 혹시 멜론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는지 아파트 창밖을 내다봤고 그 직감이 틀리자 술 취한 나에게 그 무거운 멜론을 들려 보냈는지 걱정했다는 것이다. 정답은 알 수 없다. 그녀의 멜론은 어디로 갔을까.


멜론의 수수께끼를 뒤로한  휴대폰 사진첩을 봤다. 역시 위스키 월드컵의 우승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많은 위스키들의 라벨을 보니  가지 특징이 기억났다. 그중 하나 발렌타인에서 처음 선보였다는 싱글몰트 위스키 발렌타인 글렌버기. 발렌타인, 대중적인 술이 아닌가?(물론 이름만 대중적이고 식도로 넘기는 경험은 대중적이지 않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도 '발렌테인 n'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발렌타인이 싱글몰트 위스키를 출시했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사실 A양의 집에서 마셔봤지만 전혀 기억에 나지 않기 때문에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 녀석의 맛이 궁금해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간단히 준비를 했다. 위스키를 마실 때에는 공복인 상태에서 잘 준비를 마치고 그것을 즐긴다. 공복을 선호하는 이유는 위장에 무언가 가득하면 내가 위스키를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위스키가 음식물에 흡수되는 느낌이 든다. 공복일 때 그것이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내려가는 따뜻한 느낌을 더 잘 느낄 수 있고 음식물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닌 그것을 느끼고 즐기는 시간이 된다. 그렇게 방안에는 나와 위스키만 있는 것이 된다. 잘 준비를 마치고 위스키를 마시는 이유는 위스키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수면으로 가는 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잘 준비를 다 해놓고 내 몸을 또 깨울 수는 없으니 샤워는 미리 한다(어쩌면 위스키에 취하고 나면 씻는 게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불빛은 전구색, 음악은 재즈를 선택한다. 이제 발렌타인 글렌버기를 마신다. 꽤 가볍게 넘어간다. 사과향을 입혔다고 하니 머리로는 사과향이라고 알고 있지만 코와 입 안에서는 '과일향이 난다.' 정로도 추리를 마친다. 혀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닌 코 뒤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향. 위스키가 질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다.


'이 녀석은 그날 몇 위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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