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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리 Jun 11. 2022

보모어

나의 첫 위스키

 한때 소설에 빠져있었다. 자세히 말하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빠져있었다. 작가의 담백한 문장들이 좋았다.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그의 문장은 소설 속 세계를 고요하게 만든다. 그의 건조한 문장들은 등장인물들도 모두 무표정을 짓고 있게 만들고 독자의 표정까지도 무표정으로 만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느낀 감정은 고독에 가깝다. 대부분의 하루키 소설은 주인공의 자아성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고요한 우물 한가운데 있다고 느꼈다. 소설의 결말에 다다랐을 때는 우물에 큰 돌덩이라도 떨어진 듯 강하게 펑! 하는 폭발음과 진동이 내 가슴까지 전해졌다. 사회 초년생 때 직장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번 아웃된 나는 그 자극이 좋았다. 근무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소설을 읽다 잠들다를 반복하여 나중에는 꿈인지 소설인지 현실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경험했다.


그런 하루키 소설 속 한 단어가 내 궁금증을 자극했다. ‘싱글몰트 위스키’ (닥치는 대로 하루키 소설을 구매해서 읽던 때라 정확히 어떤 소설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대학교 신입생 OT부터 취업해서 일을 할 때까지 내가 마신 물의 양과 소주의 양은 비슷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날씨가 좋으면 날씨가 좋다고 잔디에서 마시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튀김 안주와 술이 당긴다고 마시고,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에는 일찍 끝나 낮술을 해야 한다며 마시고, 수업이 늦게 끝나면 수고했다고 또 마셨다. 그뿐인가 축하, 위로, 단합이 필요한 자리에서 마시고 동아리 회식과 과 회식 때 마시고, 회식이 없는 날에는 회식이 없으니 “오랜만에 우리끼리!”를 외치며 동기들과 함께 마셨다. 오죽하면 평생에 내게 화를 낸 적 없던 엄마가 그렇게 떡이 되어 들어올 거면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었다.(‘네 아빠 닮아서~’라는 단골 멘트는 덤으로 붙는다.)

대학교만 졸업하면 소주와 이별할 줄 알았는데 회사에서도 소주는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 책상에는 항상 밀크시슬과 여명808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동료는 회식이 잡힌 날 은밀하게 내게 우루사를 건네기도 했다. 미친 듯이 소주를 식도에 때려 붓고 한껏 업 돼서 소리를 지르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양말도 벗지 못한 채 침대 위에서 엄마의 잔소리 폭격을 받는 나의 모습과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은 대조되었다. 고독과 함께 싱글몰트 위스키를 삼키는 주인공은 내 시끄러운 인생과 달라 멋져 보였다.


‘그래서 싱글몰트가 뭔데?’


2n 년 소주 파는 문맥상 ‘술이구나.’ 정도만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다. 검색해 보니 한 증류소에서 만든 몰트 위스키(100% 보리)를 뜻한 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단지 위스키의 한 종류임을 알게 된 나는 뭘 마셔야 할지 몰라 더욱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연태 고량주 같은 상표가 정확하게 언급되었더라면 접근이 훨씬 쉬웠을 거라며 하루키를 원망했다. 초심자는 도전이 실패로 연결될까 봐 늘 두렵기 마련이다. 게다가 한 병에 2천 원도 안 되는 소주를 마시다가 위스키를 입문하려니 내 마음속에서는 수 없는 저울질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첫 위스키는 신중해야 했다.


다행히 하루키로 유명해진 싱글몰트 위스키를 곧 찾아냈다. 보모어.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 여행이라는 책을 통해 유명해진 아일라 위스키(Isaly 지역 증류소에서 생산된 위스키)인 보모어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머릿속에 각인된 위스키이다. 영화 속이나 친척 집 술장에서 양주라고 불리던 동글 넓적한 병과는 다르게 길게 잘빠진 병에 담겨있는 갈색의 위스키,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위 말하는 보모어병에 걸렸다. -병의 치유 방법은 잘 알고 있다. 갈망하고 있는 것을 해소하면 그 병은 낫는다. 단발병은 단발로 머리를 자르면 완치가 되고, 아이패드병은 아이패드를 구입하면 완치된다. 보모어를 사기로 마음먹었고 곧 보모어병은 면세점에서 완치되었다.


‘와 씨, 이거 어디에 따라 마시지.’ 나는 소위 장비 빨을 내세우는 사람이다. 서핑을 처음 시작할 때 바로 슈트부터 사며 러닝, 테니스, 등산 모든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풀 세팅해야 직성에 풀린다. 덕분에 아직 빛을 보지 못 한 녀석들도 여럿이다. 장비를 주문하는 내 손가락보다 빠르게 싫증을 느끼는 내 성격을 탓해야지.


집에는 물컵과 맥주잔 그리고 와인잔밖에 없었고 그들은 모두 내 보모어를 빛내줄 수 없다. 보모어를 식도로 넘기기 전에 글레네언 글라스 먼저 주문했다. 글라스(잔)는 위스키를 마시기 위한 도구이지만 향을 맡을 때도 사용한다(위스키는 어렵지 않아, 미카엘 귀도)고 하니 얼마나 멋진 도구인가. 곧 글라스가 도착했고 나는 전구색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으며(언젠가 책에서 나왔던 고독한 주인공들처럼) 보모어를 내 식도를 타고 넘겼다. ‘꼴깍’ ‘음 내 식도가 여기 있구나. 그래, 보모어가 지금 위장으로 도착했어.’ 분명 식도가 불타버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강렬했지만 따뜻했고 기분 좋은 넘김이었다. 이내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훈제 냄새...’ 스모키 향과 달큼한향이 느껴졌다. 술에서  알코올램프 냄새 외에 다른 향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분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좋은 게 있다니!’ 하지만 이보다 일찍 위스키를 알았더라면 달라질게 뭐가 있겠는가. 내 통장 잔고밖에 없지.

쪼르륵. 아주 적은 양을 따라 두 잔 마시고 나니 적당히 만족스러웠다. 오늘 밤을 즐기기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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