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atermelon
Oct 20. 2024
5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있었다.
우린 1년 남짓 만났고 헤어지는 날, 울다가 웃다가 엉덩이에 털이 나기 전에 다행히 헤어졌다.
작년, 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예상치 못하게 그를 다시 만났다.
처음엔 자리로 가다가 흠칫 놀랐지만, 중간 인터미션 때, 뭐 어때? 하는 마음에 인사를 했고, 그 친구도 반갑게 맞이해 줬다.
그 뒤로 어쩌다 보니 안부를 나누게 되었고
난 내 전 남친에게 나의 첫 가출 소식을 전했다.
그는 이건 가출이 아니라며
'마실'정도로는 쳐줄 수 있다며 서른이 넘어서 호텔 간걸 뭘 가출이냐고 했고
내가 그런가? 하며 궁금하면 종로 오던가, 밥 살게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런데 웬걸,
나 진짜 간다?
나 어차피 지금 근처야 라고 답한 그.
나와 사귈 땐 막 운전을 시작해 접촉사고가 일상이었던 그가, 자기 차를 몰고 30분도 안 돼서 호텔 앞에 나타났다.
우리가 사귈 때도 안 가본 호텔을 헤어져서 이제야 왔다며 드립을 치며,
너 여친님께 말은 하고 왔지? 확인했다.
응, 지금 열일 중이셔라는 그의 답에
우리는 파스타와 와인을 마시러 호텔 바로 앞 작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최근 한 반년동안
아니 최근 몇 년 동안
이렇게 지적인 밤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정말 다양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사회 초년생이고 그는 아직 학생일 때 만났던 우리가 이젠 둘 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말썽 부리는 후배와 일해야 하는 선배의 고충을 나누었다. 마치 우리가 대단한 꼰대라도 된 것처럼 요즘애들은 달라라고 하며.
그 친구가 여전히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내가 새로 좋아하게 된 프리다이빙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음악이 왜 우리가 익숙한 오선지 위에서만 표현되어야 하냐고, 오선지가 아닌 기하학적인 악보를 만들어서 소개한 교수님이 있다며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는 그의 앞에서,
나는 내 오선지의 제한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연인도 아니고
서로 로맨틱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해 쌓인 수많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바로바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깊게 대화할 수 있는 우리.
어쩌면 연인이었던 우리보다 이런 이상한 관계인 우리가 더 지속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여친 일 끝났다고 여친님 픽업 가셔야 한다는 그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방으로 올라가면서
비혼주의었던 그가 이제는 진짜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는 그 여친분과 꼭 좋은 집을 구해서 잘 함께하길 바랐다.
전연인인 나를 만나러 온 자기 남친에게
전여친 잘 만났냐며, 둘이 같이 찍은 사진 보여달라 재미있어하는 그 여친분이라면,
내가 아는 그 친구와 정말 재미있게
잘 살것이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