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오지 않을 사랑 1
골프장 프론트에는 가수와 모델이 나란히 서서 일하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가수의 인기가 점점 높아졌다.
나는 10시 30분 레슨을 받고, 그렇게 하루의 일정이 반복되었다.
집 앞에는 50평 남짓한 창고를 매입해 나만의 왈츠 연습장으로 꾸몄다.
가수에게 춤을 배우고, 모델도 함께 참여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남자 댄스 프로를 초청해 자이브, 룸바, 왈츠 세 종목을 연습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빗소리가 들려왔다. 이슬비보다는 굵은 비였다.
비가 거세지자 많은 사람들이 경기를 멈추고 나왔다.
나는 우산을 쓰고 퍼팅장으로 나갔다.
그래도 몇몇은 비를 맞으며 끝까지 라운딩을 하고 있었다.
퍼팅장 처마 밑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젖어가는 초록빛 잔디를 내려다보았다.
비에 젖은 골프장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신발을 벗고 발을 쭉 내밀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발등으로 맞았다.
이상하게도 그 감촉이 좋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셋이 함께 라운딩을 한다.
연습장에는 프로가 두 명 있는데, 모두 열정적으로 가르친다.
골프장을 매입한 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도 아닌데 시골에서 혼자 사는 건 조금 쓸쓸했다.
그러나
무당할머니 집에서 1년 반이 넘는생활은,
내 인생에 새로운 활력을 준 것이 분명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이다.
집으로 내려가 샤워를 하고 테라스에 앉았다.
잠시 후, 퇴근한 가수가 들어왔다.
“골프장 생활, 즐겁니?”
“네.”
“모델이 생고기를 사 온다는데, 비도 오니 한잔하자.”
빗소리 들으며 생고기에 소주 한잔. 참 좋은 그림이었다.
모델이 들어오며 웃었다.
“언니, 나도 안아줘요.”
“그래, 그래, 우리 아가…” 하며 품에 안았다.
거실은 춤을 출 수 있도록 넓혀두었다.
비가 점점 거세져 자리를 거실 안으로 옮겼다.
왈츠가 주는 행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해본 사람만이 안다.
어느 날이었다.
골프장 아래에 절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날씨가 좋으면 내일쯤 가볼 생각이었다.
둘은 출근하고, 오늘은 쉬기로 했다.
운동화를 신고 집 앞 마을을 천천히 걸었다.
30분쯤 걸으니 카페와 호프집, 식당 몇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있다고만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정겹고 좋았다.
카페에 앉아 주스를 주문하고, 테라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젊은 여자가 혼자 운영하는 듯했다.
남편은 출근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쯤 앉아 있었지만, 손님은 끝내 오지 않았다.
카페 주인에게 물었다.
“이 근처 절에 스님이 몇 분 계세요?”
“한 분 계세요.”
“그래요? 절에 다니시는 건 아니고요?”
“아니요, 그냥 한 번 가보고 싶어서요.”
카페를 나와 절로 향했다.
멀리서 보니 규모가 크진 않았다.
하지만 대문을 들어서자 놀라움이 밀려왔다.
정원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본채와 별채 두 채, 대지는 400평쯤 되어 보였다.
텃밭도 넓게 가꾸어져 있었다.
뒤쪽으로 돌자, 한 남자가 웃옷을 벗은 채 역기를 들고 있었다.
스님이었다.
국가대표 역도선수라도 보는 듯한 체격,
그의 팔과 어깨, 잔근육이 눈부시게 힘찼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기침을 하자, 그가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옷을 입었다.
“스님, 몸이 참 좋으시네요.”
“하하, 운동을 조금 합니다.”
그는 합장을 하며 인사했다.
잠시 후, 스님은 샤워를 하고 나와 마당의 그늘막 아래서 녹차를 내왔다.
차 한 잔의 여유, 참 오랜만이었다.
“여기 오래 계셨어요?”
“속리산에 있다가 이곳으로 온 지 10년쯤 됩니다.”
결혼하는 종파의 스님이었다.
“결혼도 하셔나요?”
“네. 했는데… 사별했습니다. 딸은 부모님 댁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녁은 혼자 드시냐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제가 밥 해드릴게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모델에게 반찬 좀 가져오라 했다.”
그렇게 준비한 식탁 위에는 된장국과 불고기, 나물 몇 가지가 올랐다.
5시 반, 두 여인이 도착했고, 넷이 마루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스님, 막걸리 한잔 하시죠.”
“좋습니다. 딱 한 잔만.”
그의 키는 180쯤, 몸무게는 90킬로 정도.
운동선수의 몸이었다.
가수와 모델도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밤 9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 10시에 다시 절을 찾았다.
스님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햇빛 아래 땀에 젖은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골프장에서 반찬을 조금 가져왔다.
“며칠은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점심 준비를 하며 시원한 콩나물을 끓였다.
샤워를 마친 스님이 나오자 밥상을 내왔다.
상추에 불고기를 싸서 한입 권했다.
“이건 어제 남은 막걸리예요.”
식사 중 스님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모님이 스님이었지만, 자신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증권회사에 다니다가 결혼, 그리고 아이와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원인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을 버리고 딸을 데리고 절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게 15년 전의 일이다.
이제 딸은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절에서 공부 중이라 했다.
“무슨 공부요?”
“한의대를 나와 한방병원을 차리라 했지만, 안 하네요. 그냥 절 공부를 한답니다.”
그는 이어 말했다.
“여긴 제 명의의 절입니다. 교회나 절도 개인이 사고파는 세상이에요.
골프장이 들어오면서 땅값이 많이 올랐지만, 팔 생각은 없습니다.
기도 중에 이곳이 보여서 왔으니까요.”
“딸을 한 번 보고 싶네요. 아주 예쁠 것 같아요.”
“언제 한 번 저희 아버지 절에도 놀러 오세요.”
그날 저녁도 내가 준비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확실히 그 사람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물감이 스며들 듯,
이슬비가 조용히 내리듯,
내 마음은 어느새 그에게 젖어 있었다.
그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사랑이 아닐지라도, 지금은 행복했다.
좋은 사람을 위해 밥을 짓는다는 것,
그 단순한 행위가 내 하루를 빛나게 했다.
나는 매일 절을 찾았다.
어느날이였다.
저녁을 함께 먹고 있는데,
창밖으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요동쳤다. 오렛만에 보는 큰 비이다.
천둥이 우레처럼 몰아치고, 번개는 대지를 가르며 떨어졌다.
태어나서 그런 비를 본 건 처음이었다.
빗방울이 처마를 두드리며 쏟아지는 그 소리는 세상의 울음 같았다.
설거지를 마쳐도, 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내리고, 산속의 절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바람은 거세게 불었고, 창문 틈새로 빗물이 흘러내렸다.
이래서 옛 어른들이 “남녀는 어둔 밤에 단둘이 있으면 안 된다” 했던 걸까.
세상은 고요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 사람의 품에 안겼다.
어쩌면 내가 먼저 원했는지도 모른다.
말이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비처럼 자연스러웠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고, 서로의 온기가 퍼졌다.
그건 마치, 긴 세월을 돌아 다시 만난 사람처럼
낯설지 않은 따스함이었다.
신혼 첫날밤처럼 황홀하고, 동시에 아득히 슬펐다.
사랑이 이렇게 달콤한 동시에,
언젠가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새벽녘, 창문 틈으로 비가 잦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그가 내 옆에 잠들어 있었다.
그 순간, 여자는 이런 것 하나로도 행복해진다.
그의 숨소리, 그의 체온, 그 평온함이 내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절에서 머물렀다.
밖의 세상은 잊은 채, 우리는 서로의 시간 속에서 살았다.
눈을 뜨면, 바위처럼 단단한 그의 어깨가 떠오르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일주일 사이, 나는 완전히 그에게 사로잡혔다.
그는 내 마음을, 그리고 내 삶을 흔들었다.
거부할 수 없는 남자였다.
내 신용카드를 그에게 건넸다.
“필요한 데 쓰세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고마워. 잘 쓸게.”
그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순간, 마치 만 볼트의 전기가 온몸을 스치는 듯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의 품 안에서 모든 감각이 멈추고, 세상이 멀어졌다.
내 귀에 속삭였다.
“최상희를 이렇게 사랑한 남자는… 아마 나뿐일 거예요.”
"사랑해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그 품에 머물렀다.
이런사랑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