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도시의 아침에는 비밀이 많다

#《여자와 여자 사이, 말할 수 없는 것들》

by 전태현 작가
ChatGPT Image 2025년 6월 29일 오전 11_51_35.png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걷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즈음,

휴대폰 벨이 울렸다. 동생이었다.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

“언니가 먼저 연락해야 하는데, 니가 먼저 전화를 다 하네.”



“잘 지냈지?”
“네.”
“세상에, 안 본 사이에 언니 거짓말도 늘었네요.”



“아니야, 진짜야.”
“아이구, 믿어드릴게요.”



“집이야?”
“응.”

“떡 했는데 같이 먹어요, 언니.”



“그래, 냉커피 만들어 갈게.”
“얼음 많이 넣어주세요.”
“응.”




그날 이후 처음 연락을 나눈 듯하다.

오랜만의 통화였다.



동생은 한 가지 사실만 제외하면 참 괜찮은 여자다.

키 크고 단정하며 외모도 출중하다.

외제차를 몰고, 옷도 깔끔히 입는다.

손재주도 있어 살림도 야무지게 잘한다.



하지만 그녀의 성향은 남다르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이다.

늘 안타까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언니!” 하고 들어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반가움을 나눴다.

“잘 지냈어?”




“바쁘게 살았어요. 떡 드세요.”
식탁에 마주 앉아 인절미에 냉커피를 곁들여 담소를 시작했다.



동생은 남편의 사무실에서 경리 업무와 잡무를 돕고 있었지만,

최근엔 일이 줄어 남편이 쉬라고 했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부터 안 나간 거예요.”
“아이들은?”
“다들 나갔어요.”




그렇게 여느 자매들처럼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고,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언니, 음악 들을래요?”
“좋지. 어떤 곡인데?”
“좋은 곡을 다운받아 왔어요. 들어보세요.”




바이올린으로 연주된 카사블랑카가 흘러나왔다.



“눈 감고 들어봐요.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요.”

눈을 감았다.


오래전 오빠와 부르스를 추던 순간이 떠올랐다.



“언니, 저랑도 한 곡 출래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음악 소리를 조금 높이고, 그녀는 가볍게 춤 포즈를 취했다.



무심결에 나는 여자의 포즈로 걸어 나갔고,

동생은 남자의 스텝으로 다가왔다.



가볍게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몸이 닿지 않게 조심스레 서 있었지만, 순간 떠오른 건 오빠의 얼굴이었다.



여자는 때로,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동생의 손이 나의 허리를 감싸오는 것을 느꼈지만,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있었다.



행복한 상념 속에 젖어 있었다.

지금 이 평온함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스쳤고,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깊은 혼란 속에서도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속삭였다.

“언니, 사랑해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살짝 밀쳐냈지만, 그녀는 나를 꼭 껴안았다.



“언니,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줘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오빠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동생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나는 그녀의 호흡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이 지나고, 그녀는 내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언니, 고마워요.”

그리고 눈물을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왜 울어?”
“언니… 저, 이런 느낌… 몇 년 만이에요.”

이어지는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예전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자 이야기,

감춰온 비밀스러운 연애, 남편에게는 철저히 숨겨온 시간들.



“남편은 몰라?”
“네. 알면 끝이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말했다.




“언니… 사실, 그 여자랑 있을 땐 느꼈어요. 남편하고는… 한 번도요.”



“그럼… 오늘은?”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런 느낌.”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언니, 부탁이 있어요.”
“모텔 가자는 말만 빼고, 말해봐.”
“가끔… 저랑 부르스만 춰주세요.”

나는 말이 막혔다.




“일단은 네 마음을 알았으니, 진정해. 부르스 추는 걸로… 알았어.”
“언니…”




“진정하고 집에 가.

내일은 바쁘니까, 모레 연락해.”



그렇게 나는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추슬렀다.





“대체 뭐야, 이건…”

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가 키스하던 순간의 감촉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이게 뭔가. 그저 흔한 감정의 일탈일까.
찬물로 샤워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자와 여자가 6년을 함께 지내며, 남편에게 들키지도 않고 살다니.
그 재주도 놀랍기만 하다.




샤워를 마친 뒤 머릿속이 조금 맑아졌다.
그녀와 춤을 추자고 먼저 말했던 나 자신이 미웠다.



그렇다고 내가 피해자라고만 할 수도 없다.
나 역시… 그 순간, 멈추지 않았다.




오빠에겐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칠지, 생각만으로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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