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와 백합의 기억
사유리가 여기온지 시간이 쾌 흘렀다.
연한 햇살이 바닷가 골목을 타고 내리던 오후,
나는 사유리와 함께 바다를 산책하고 있었다.
여기는 눈만 뜨면 바다이다.
그리고 집들은 초라한 초가집이 대부분이고,
일본사람 특히 장사하는 사람의 집은 호화스럽다.
군수의 집은 10여년전에 현대식 일본건물로 지어져서 조선시대로 말하면
사대부집안의 집이다.
내가사는 집과 군수의 집은 불과 몇분거리이다.
바람은 적당히 불었고, 파도는 마치 오래된 자장가처럼 낮게 속삭였다.
그러다 갑자기, 하늘이 검게 일그러지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손을 잡고, 젖은 돌길을 맨발처럼 내달려 정자 아래로 뛰어들었다.
사유리는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나는 교복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고,
그 순간 처음으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수줍게 눈을 피하며 젖은 머리칼을 정리했고,
나는 그 시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손끝이 내 뺨을 스치자,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떨림이 올라왔다.
그녀의 젖은 옷 사이로 드러난 가녀린 윤곽은,
아직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하나의 운명처럼 다가왔다.
꿈속에서 그녀와 함께 정자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체온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듯한 감각,
그건 내 삶에서 처음 겪는 감정의 폭풍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사유리를 보았을 때,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웃었지만,
나는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할 수 없었다.
한순간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남매처럼, 친구처럼, 그러나 누구보다 특별한 관계로 엮여갔다.
사유리는 내게 처음으로 ‘설렘’이라는 말을 가르쳐준 여자이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백합처럼 하얗던 그녀의 미소와,
그날 정자 아래서 들려오던 소나기의 소리를....
그 모든 것이 내 첫사랑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나의 세계가 무너지기 전 마지막으로 순수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