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나의 순수함이 없어진 해이다
세상이 뒤집혔다.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두 발을 맞고 항복한 것이다.
그날 이후, 통영에 머물던 일본인들은 귀국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군수 역시 며칠 내로 조선을 떠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일본인들은 대부분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군수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곳곳에서 친일파를 색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데리고 일본으로 갈 생각이었다.
“이곳에 남아 있다간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군수에게 전했다.
군수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지금은 내 한 몸, 내 가족 지키기도 벅차네.
전상, 어떻게든 일본에 오게. 이 주소로 오게나.”
군수의 말에 아버지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작은 수건에 싼 꾸러미를 아버지의 손에 쥐여주었다.
“일본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네.
일단 대마도까지만 오면 안심이 될 것이야.”
수건 안에는 순금 1kg, 지폐, 패물 등이 들어 있었다.
군수의 집은 순사들이 지키고 있어 내부는 안전했지만, 밖은 지옥과도 같았다.
다음 날 출항 예정이던 배는 이틀 연기되었고,
통영의 일본인들은 부산을 통해 떠나기로 하였다.
그날 밤, 순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 무렵, 인기척이 들렸다.
‘우… 윽…’
소녀의 방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급히 달려가 보니, 군수 부부가 포박되어 있었고,
세 명의 사내가 사유리를 짓밟으려 하고 있었다.
사유리의 원피스는 찢겨 있었고, 가슴이 노출된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마루 위에 놓인 낫을 집어 들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세 놈을 순식간에 찔렀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신음하며 쓰러졌다.
잠시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와 그 광경을 보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낫을 들고 쓰러진 자들을 다시 한 번 찔렀다.
피가 사방에 튀었다.
“어르신, 아내와 아이를 일본으로 꼭 데려가 주십시오. .”
“자네는?”
“여기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어르신도 이곳에 오래 계시면 위험합니다. 어서 떠나십시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군수가 준 패물을 건넸다.
“꼭 간직해. 군수님과는 부산에서 함께 떠날 수 없어.
따로 밀항할 거야. 이거면 충분히 갈 수 있어.”
대마도는 부산에서 50km 거리.
일본 군수는 무릎을 꿇었고, 부인과 사유리도 함께 머리를 숙였다.
“전상,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자네의 빚은 꼭 갚겠네.”
새벽 3시. 간단한 짐을 들고 3km를 걸었다.
아버지는 군수의 집으로 돌아가 시체들과 함께 불을 지르고,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우리는 새벽 어스름 속, 통영을 빠져나왔다.
“어르신, 이제부터는 직접 운전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부산 사상에 있는 일본인 가정에 몸을 숨겼다.
어머니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스스로 일본으로 가야 해. 여기 오래 있으면 위험해. 내일 아침 10시,
부산항에서 배가 떠나. 그전까지 피신하자.”
주머니엔 약간의 돈이 있었고,
순금은 어머니의 허벅지에 단단히 묶어 두었다.
근처 허름한 빈집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여전히 일본 옷을 입고 있었다.
돈을 조금 주고 근처에서 한국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머니, 오늘이나 내일이 가장 위험해요.
사람들은 우리가 부산으로 밀항할 거라고 예상할 거예요.
부산은 피하고, 통영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갑시다.”
어머니는 보따리를 열어 금가락지, 은비녀, 옥가락지들을 세어 보았다.
지금은 배를 구할 수도 없고, 배주인이 밀고라도 하면 바로 체포될 수 있는 상황.
우선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계획을 다시 짜기로 했다.
나는 머리를 빡빡 밀고 승복을 입었고,
어머니는 서양식 단발로 머리를 자르셨다.
여관에서 3일을 보낸 후, 사람 없는 곳보다 번화한 곳이 숨기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부산 남포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부자 동네였고, 뱃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호텔에 취직했다.
남편은 일본인, 아내는 한국인이었다.
나는 호텔 보이로, 어머니는 청소부로 일했다.
우리는 통영에서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출신지를 묻는 말엔 “울산”이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일본어를 너무 유창하게 구사했기 때문이다.
몇 달이 흘렀다. 어머니와 나는 외출을 삼갔다.
혹시라도 통영 사람을 마주칠까 두려웠다.
아버지의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45년 12월, 겨울.
장기 투숙객들 중엔 선장들도 있었고, 일본인도 드물게 남아 있었다.
어느 날, 한 선장이 어머니를 흘깃거리기 시작했다.
조선에선 보기 드문 서양 스타일의 미인이었기에 그럴 만했다.
며칠 뒤, 그 선장이 일본으로 가는 배를 맡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술 한잔을 권했고, 조심스레 물었다.
“선장님, 아들과 저를 일본으로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선장은 눈치를 챘다.
“일본인이라면 밀항할 이유가 없지. 조선인이라면 친일파, 혹은 범죄자일 테고…”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서 울음을 삼키며 기다렸다.
얼마 뒤, 어머니는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우리, 일본으로 가자.”
이틀 뒤, 배가 출항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살인 혐의로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선장이 밀고한 것이었다.
호텔 사장이 우리를 도왔다.
“경찰이 곧 들이닥칠 겁니다. 어서 도망가세요.”
우리는 인력거를 타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가져온 것이라곤 돈과 패물뿐이었다.
부산에 머무를 수 없었다. 우리는 지명수배자였다.
울산으로 향했다.
그해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울산의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잠자리를 제공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어머니는 하얀 한복을 입고, 나는 모시 저고리 위에 겉옷을 걸쳤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국밥은 그 무엇보다 따뜻했다.
“올겨울은 여기서 지내고, 내년 봄에 떠나자.”
1946년 3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일본인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평범한 조선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영도에 자리를 잡고, 작은 식당을 열었다.
어머니는 주방에만 머물렀고, 나는 부두에서 막일을 했다.
어떻게든 대마도로 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미국인 선교사를 만났다.
간청했다.
“부디 저희를 일본으로 데려가 주세요…”
출항 전날 밤, 우리는 선교사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밤 10시쯤 잠들었는데,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셨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거실로 나섰다.
윗층에서 소리가 났다. 선교사의 방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어머니는 나를 일본으로 대려가기 위해서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신것이다.
내려와 다시 자리에 누웠다. 눈물이 흘렀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샤워를 마치고 나를 깨웠다.
“씻고 나와라.”
“네…”
아침을 함께 먹고 부두로 향했다.
선교사는 우리를 자신의 아내와 하인이라 소개했다.
증명서를 제시하자, 배에 승선이 허락되었다.
배가 닻을 올리고 대마도로 향해 출항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꼭 돌아오리라…’
그날 저녁, 대마도에 도착했다.
선교사는 우리에게 미국행을 제안했지만, 어머니는 거절했다.
작은 호텔에 머문 뒤, 우리는 일본 본토로 가는 배를 탔다.
모아둔 돈으로 도쿄까지는 갈 수 있었다.
도난만 당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산을 떠난 지 20여 일이 지난 뒤,
우리는 마침내 도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