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작은백합

#6. 꿈의 도시 동경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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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 우리는 동경에 도착했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주머니 속에서 주소를 꺼내 들고, 군수의 집으로 향했다.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밖에서 본 집은 마치 궁궐 같았다.

웅장한 대문, 그리고 3층 규모의 집.

나는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하인이 나와 “누구시죠?” 하고 묻는다.
“통영에서 온 전상이라 전해주세요.”



잠시 뒤, 사유리가 달려나와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는 셋이 껴안고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군수 부부에게 정중히 절을 올리며, 우리 모자를 거두어달라고 간청했다.



군수는 말했다.
“그 말,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동경에 오면 이 은혜는 꼭 갚겠다는 말을......”

생명의 은인이라 정중하게 우리를 대접했다.



그 자리에서 사유리는 말했다.
“아버지, 전상 고등학교에 보내주세요.”



“응, 그래야지.”

어머니는 집사의 일을 맡고, 나는 하인으로서 집안일과 청소를 도맡았다.




어르신 외출 시 짐꾼 역할을 했고, 사유리가 등하교할 때는 보디가드로서 함께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일본 전통 무술을 체육관에서 배웠다.

어머니는 글을 잘 읽고 쓰는 문장가의 기질이 있었고, 필체도 아름다웠다.



그런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 역시 글씨가 단정하고 품격 있었다.
우리는 일본 생활에 점차 적응해갔다.



한 달 후, 어머니와 나는 어르신 댁에 완전히 정착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 사유리의 어머니가 병을 앓기 시작했다.
지금으로 치면 위암이었다.


아직 마흔 중반의 나이였지만,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한국에서 들려온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그날 밤 통영 사람들의 죽창에 찔려 숨졌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친구가 시신을 산속 어딘가에 묻었다고 전해왔다.



우리 넷은 슬픔을 감추고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사유리도 나도 말없이 고통을 삼켰다.



시간이 흐르자 과거는 점차 흐려졌고,

그해 여름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열여섯 살이었다.


사유리는 인근 여고 2학년, 나는 1학년이었다.

우리는 아침에 함께 학교에 가고, 하교 시간에 다시 만났다.



나는 기모노를 입고, 외관은 마치 무사처럼 보였다.
밤에는 검도를 익혔다. 어머니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어르신은 그런 나의 모습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소년이,

이제는 딸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1947년, 어머니는 어르신의 첩이 되셨다.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첩일 뿐이었다.
사유리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집사 일을 성실히 하셨고, 어르신의 재산에 탐욕을 보이지 않으셨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 이 집을 나가자.”
어머니와 우리는 약속을 나눴다.



당시 일본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일본어에 능통했기에,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1948년, 사유리는 동경대학에 입학했다.
기사가 차로 등하교를 도왔고, 전차와 인력거도 이용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왕복 20km의 거리를 인력거로 함께했다.



어르신은 어머니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해주셨다.
그 은혜에 나도 감사함을 금치 못했다.



1949년 2월, 나는 동경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열아홉 살이었다.


어르신은 모든 학비를 지원해주셨다.

우리 모자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대학 시절, 사유리와 나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제는 아침마다 차를 타고 등교했고, 저녁엔 함께 귀가했다.
나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



대학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1950년 6월, 대학 2학년이 되던 해 한국에 전쟁이 발발했다.
방학에는 사유리와 미국 여행을 두 차례 다녀왔다.



나는 경호원 자격으로 함께했다.

1953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대기업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사유리도 졸업 후 미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와, 의류업체 간부로 입사했다.


우리모자는 어르신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출가의 뜻을 밝혔다.



어머니도 함께 떠나기로 결심하셨다.

그러나 어르신은 병을 앓고 계셨다.


암이었다. 어머니도 모르셨다.
1954년 5월, 어르신은 세상을 떠났다.



그 마지막 순간, 어르신은 사유리를 내게 부탁하셨다.



“약속하겠습니다. 그 뜻 꼭 지키겠습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그 해, 스물넷의 내가 스물다섯의 사유리에게 청혼했다.



어머니의 과거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해 가을,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어머니는 집 근처에 작은 옷가게를 열고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셨다.


집과는 도보로 10분 거리였고, 나는 매일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건설회사 입사 1년 만에 간부로 승진했다.



나는 집을 짓고, 빌딩을 짖는 일을 한다.
사유리는 회사에서 주목받는 인재로 성장했다.




어머니께 재혼을 권했지만,
“두 남자 지아비로 섬겼으면 충분하다.”



그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유리는 나의 천사다.
유년 시절을 함께한 벗이자,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다.
사유리 역시 통영에서의 시간을 자주 회상했다.



나 또한 평생 그녀만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1965년, 내 나이 서른다섯.
3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1년 전, 사랑하는 사유리도 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나는 무너졌다.
술에 의지해 살았고, 자살을 두 차례나 시도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술로 위가 망가졌고, 응급실에 실려가 3일을 누웠다.
정신을 차린 나는 무력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잠결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아, 일어나라.”
“아버지… 아버지…”

눈을 뜨니 꿈이었다.



피에 젖은 흰 셔츠 차림의 아버지가 허공에 서 계셨다.

나는 병실 창문 너머 햇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한국으로 가자.”

퇴원 후, 집의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절반은 일본 정부에 기증했고, 그 조건으로 나는 한국 서울시청 건설 고위직으로 특채되었다.

건설부 차관급의 예우였다.
지금으로 치면 기술고시 합격자에 해당하는 직급이었다.




남은 재산도 적지 않았다. 지금 돈으로 30~40억에 해당했다.

나는 눈물로 일본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밀항선으로 도망치듯 떠났던 나라에서,

이제는 당당히 비행기로 귀국하고 있었다.




김포공항에는 서울시청의 고위 간부 다섯 명이 마중을 나왔다.

“반갑습니다, 전성근 씨. 서울시 건설총괄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호텔로 이동한 뒤, 건설총괄은 조용히 말했다.



“대통령께서도 큰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나는 대답했다.



“출근은 일주일 뒤로 하겠습니다. 거처부터 마련해야 하니까요.”



그날, 내 곁에는 말단 여직원이 배치되었고 간부들은 떠났다.


"그녀는 나의 개인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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