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작은백합

# 대한민국 땅 투기꾼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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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강남 도시개발 발표가 나기 6개월 전, 나는 건설회사를 설립했다.


어린 나이에 회사를 차려 대표이사가 되었고, 이내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 시작이, 문어발식 계열사를 확장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항공, 자동차, 선박 산업 모두가 초기 단계였다.



나는 강북 한강변에 500세대 규모의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5층짜리였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초고층 아파트였다.

나는 언제나 강남 개발 입찰의 선봉에 섰고,

서울시도 나의 뒤를 든든히 지지해주었다.

중앙정보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강남 한강변에 5,000세대 규모의 아파트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 자체만으로도 신도시를 조성하는 수준이었다.


강남 도시개발의 상징이 될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내가 거주하던 이태원 일대의 토지 또한 개발 소식과 함께 폭등했다.

개발 계획이 발표되고, 보상이 이루어졌다.

예상치 못하게 내 집까지 도시계획에 포함되어 이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고,

나는 그해 모든 부동산을 처분했다.



일본에서 가져온 40억 원과 각종 상납금이 땅 속에 묻혀 있었고,

정부 보상금으로 강남에서 약 1천억 원, 강북에서 약 500억 원,

총 1,500억 원에 달하는 보상을 받았다.



이는 단독 1위 수치였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의 1,500억 원은 지금으로 치면 수조 원에 달하며,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보냈던금액조차 지금 기준으로 환산이 불가능할 정도다.


당시, 나는 대한민국에서 자산 기준으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강남 입찰에서 5,000세대 아파트 수주에도 성공하며,

건설업계 최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장인어른도 나의 빠른 성공에 놀라워했다.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었고, 터파기가 진행됐다.

공사 기간은 2년이었으며, 5층 구조였기에 콘크리트 양생도 빨랐다.



기존 이태원 집은 철거되었고, 장인어른의 별장에서 아내 선미와 함께 머물게 되었다.

나는 선미에게 약속했다.


“이 공사가 끝나면 궁궐 같은 집을 지어줄게.”



그러나 그 당시엔 집을 지을 여유조차 없었다.

경쟁 업체들이 나를 모함하기 시작했고,

중앙정보부에 투서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납금을 두 배로 늘리자, 모든 문제는 묵살되었다.

그 시절엔 돈만 잘 바치면 투서는 곧잘 사라지는 시대였다.



서울의 건설 경기는 활기를 띠었지만, 지방은 여전히 정체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선미가 임신했다.


기쁨에 겨워 나는 아내를 안고 춤을 추었다.


아파트 공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분양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귀한 아들을 얻었다.

나와 아내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고, 장인·장모님도 매일같이 손주를 보러 오셨다.



가사일과 회사일을 김 비서가 도맡아 처리했다.

김비서는 완벽한 나의 손발이였다.


그녀는 내가 직접 스카우트한 유능한 직원이었다.

그때가 바로 1975년이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50층 규모의 고층빌딩이 막 공사에 들어갔고,

나의 회사는 해마다 몇 배씩 성장해갔다.


상납금은 이전에 비해 10배 이상 증가했지만,

나는 그만큼 많은 이익과 정부의 특혜를 동시에 누렸다.

상납금은 중앙정보부와 대통령에게 직접 들어갔다.



당시 대통령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규모의 선거 자금을 필요로 했다.


나는 돈 버는 일에만 몰두했다.

다른 여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잠자리도 만족스러웠고,

다른 여자들이 아내보다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쩌면 선미가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능숙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해 검도와 운동을 했다.



가끔 김 비서가 눈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답고 섹시했으며,

항상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신은 채 일처리를 정확하게 해냈다.



사생활은 묻지 않았기에,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본사 50층 건물을 소유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1위 건설그룹의 회장이 되었다.

항공사 인수도 고려 중이었다.


물론 항공사는 대통령 친척이 운영 중이라 쉽진 않았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항공산업은 체면만 좋을 뿐, 실제 수익성은 낮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초청도 잦았다.


한 달에 한 번은 중앙정보부 관계자들과 ‘남산요정’에서 회식을 가졌다.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해 정계 요인 10여 명이 참석했다.


나는 참석자들의 차량 트렁크에 현금 상자를 넣어주었고,

밤에는 젊고 아름다운 기생들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했다.




밤 10시가 넘으면 인사를 드리고 곧장 귀가했다.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젊은 여자 품에 안기지, 왜 그냥 왔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보다 예쁜 여자는 없어요.”

그날 밤, 우리는 아들을 재우고 불타는 밤을 함께 보냈다.

나는 아직도 불꽃 같은 에너지를 지닌 남자였고, 아내는 그런 나를 깊이 사랑했다.




다음 날 아침, 김 비서가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 목에….”
아내는 거울을 보더니 나를 툭 치며 말했다.



“이 사람, 창피하게 못살아….”



목에 키스 자국이 선명했다.



아내와 아이를 안고 출근길에 나서며,

강남의 허허벌판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고, 건설 경기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장인어른은 건강 악화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골로 내려가셨고,

나는 장인의 사업까지 인수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아파트 열풍에 휩싸였다.

전국 주요 도시에 지사를 설립하고, 토지를 매입하여 아파트 사업을 진행했다.

아파트는 단연 최고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이었다.

다음으로 돈이 되는 사업은 자동차였다.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 채용한 경호원들과 변호사들을 대동했다.

수장은 김 비서가 맡아 전반적인 관리를 총괄했다.


강남 청담동에 약 1만 평의 부지를 남겨 두었고, 그곳에 드넓은 저택을 지었다.


1층 200평, 2층 150평 규모에 수영장, 마당, 축구장, 테니스장 등 모든 시설을 갖추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스포츠는 없었지만,

혼자 달리기나 검도, 유도 정도를 즐겼다.

골프는 하지 않았고, 아내와 아이와 함께 수영장에서 노는 것이 일상의 행복이었다

가끔 아내와 테니스나 배드민턴을 즐기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공사 수주가 이어졌고, 선박 건조도 활발해졌다.

나는 그렇게 1970년대의 서울을 전력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주)00그룹은 10여 년 동안 눈부신, 아니 기적 같은 성장을 이뤘다.
1974년,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직접 맡았고, 경부고속도로, 남산타워 등의 대형 프로젝트를 시공했다. 이후, K항공, 현자동차, 현선박, 현캐피탈, 현화학, 현반도체, 현전자 등 10개 이상의 계열사를 설립하였다.



지난 15년 동안,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나와 한 팀이었다.


언제나 그 사이에는 ‘자금’이 흐르고 있었다.

일본 대사관과의 교류도 꾸준히 이어졌다.



지금도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 관료 대부분은 친일파 후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에겐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다.

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갈수록 깨닫게 되는 진리 —


세상의 중심은 결국 ‘작은 가정’이라는 것이다.


그 작은 가정이야말로

우주를 지탱하고 정복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라는 신념은 지금도 변함없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자자손손 써도 남을 만큼의 부를 가졌음에도

나는 여전히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다.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어차피 제어할 수 없다면, 내 능력을 한껏 펼쳐보다가 이 세상을 떠나자.’



그 끝을, 내 한계를 보고 싶었다.
이 또한, 욕심일까?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는 과연…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 지배당한 35년을 지나, 이제 겨우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당연 친일 후손이 공직과 기업에 참여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1979년 12월에 어느날이다.

한국에 온지 15년이 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평탄하게 성공만 하던 나에게도 크나큰 시련이 다가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좁고 어둔운 곳에 갇혔다."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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