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작은백합

# 1970년 강남의 갈대밭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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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문득 외로움이 찾아온다.

생각보다 긴 세월이었다.



어머니와 사유리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간다.

나는 돈도 많고, 땅도 많고, 지위도 높다.


하지만 공직자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망은 없다.



그저 돈을 벌어 통영 전체를 사들이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직 통영으로 내려가진 않았다.



올해는 30층짜리 빌딩을 짓기로 했다.


D건설에 수주를 주었고, 나는 직접 공사 감독을 맡기로 했다.


설계도는 일본에서 공수해 왔으며, 내가 검토를 마친 뒤 D사에 넘겼다.


건설사 사장도 매우 만족해했다. 지금 한국에는 30층 건물이 없다.


이 빌딩은 서울역 앞에 들어설 예정이다.

명동은 고작해야 작은 빌딩 몇 개뿐이다.



나는 강북 한강변에 2만 평의 땅을 매입했다.


직접 소유할 수는 없기에, D건설 사장의 딸 명의로 땅을 샀다.


그녀는 스물일곱, 결혼한 지 석 달 만에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었고,
이후 아버지를 도와 회사 일도 조금씩 하고 있다.


서울시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할 거라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공식 발표 전부터 땅값은 몇 배로 뛰었다.



나 역시 그 지역 근처에 만 평을 내 명의로 매입했다.



서울시의 발표가 있자마자 땅값은 무려 20배가 되었고,
정부 보상까지 받으면서 시세는 30배로 뛰었다.


그 부지가 바로 유명한 주공아파트이다.
나는 그 공사를 D건설에 단독으로 맡겼다.
건설사는 여러 곳이 있지만, 서울시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중앙정보부가 개입되어 있는 상황이라, 아무 말도 못 한다.

나는 중앙정보부에 매달 상납을 했다.


그 내부에 누가 있는지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현재 상납금 1위다.


그러던 어느 날, 건설사 회장이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의 집을 그냥 갈 수 없어 좋은 술을 들고 갔는데,
대문을 열어준 이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집에 온 듯했다.


잠시 후 사장이 나왔다.
“뭐하냐? 손님 안으로 모시지 않고… 네 아버지.”
그녀는 회장의 딸이었다.


회장 집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부인과 딸이 함께 저녁을 준비했고,
식사를 마친 뒤, 그녀가 과일을 내왔다.


그리고 회장이 말했다.
“과장님, 사모님 돌아가신 지 꽤 되었는데… 많이 외로우시죠. 이제는 재혼을 고려하셔야죠.
제 아이입니다.”



“한 번 시집을 갔지만 아이도 없고, 남편도 사고로 떠났습니다.
한번 생각해 주시죠.”


“아이고… 저한테는 과분한 분입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회장은 내 손을 잡고 진심을 전했다.



“과장님, 우리 딸을 받아주십시오.”



그날 저녁, 그녀는 내 차를 타고 나의 집에 왔다.


“당분간 집안일 해 드릴게요. 결혼 전이니까… 다른 마음은 품지 말아 주세요.”


“알겠소.”


나는 1층, 그녀는 2층에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김치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이름은 선미였다.

“선미 씨는 오늘 집에서 뭐 하실 건가요?”



“아버지 회사 들렀다가 오시기 전엔 집에 있을게요.”

그렇게 우리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 결혼 결심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매일 넥타이를 매주며, 아내처럼 다정히 나를 챙겼다.

외관상 우리는 이미 부부 같았다.



어느 날 퇴근해 돌아온 집,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 중인 그녀가 반겨주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날씬한 몸매와 청순한 얼굴로, 따뜻하게 나를 맞았다.



나는 눈 녹듯 서서히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우리는 6개월을 함께 살았다.



어느 날, 나는 늘 그 시간처럼 귀가했고,
주머니 속에 작은 선물을 준비해 갔다.



창가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그녀가 보였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그녀를 끌어안고, 조심스레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나와 결혼해준다면… 평생 당신만을 생각하며 살겠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며칠 뒤, 우리는 결혼 날짜를 잡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장인·장모님의 묘소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도쿄 근교, 장인의 선산에 묘가 있었다.
마을 친척 어르신이 관리를 맡고 계셨다.



오랜만에 찾아간 마을, 어르신이 반갑게 내 손을 잡아주셨다.


아내와 어머니의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잡초를 뽑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미도 함께 절하며 말했다.


“형님, 어머님, 아버님… 좋은 곳에서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저희,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손을 맞잡고 마을로 내려와 친척 어르신께 작은 선물과 봉투를 건넸다.



그날 밤, 도쿄의 한 호텔에서 우리는 첫날밤을 맞이했다.



비록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일본은 나에게 은인의 나라였다.



어머니와 나를 살린 곳.
한국은… 아버지를 앗아간 나라였다.



그래도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 한국으로 돌아왔다.


결혼 주례는 주한 일본대사가 맡기로 했다.


장인어른과 같은 가문 출신이며, 생전에 장인과도 친분이 있던 분이다.
서울시청 안팎에서 말이 많았지만, 장인은 내 뜻에 맡기셨고,

선미 역시 존중해주었다.



결혼식 날, 수많은 하객이 몰려들었다.
나의 손님들은 대부분 서울시 건설과 직원들이었다.



김 비서가 많은 수고를 해주었다.

결혼식은 호텔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나는 조용한 사찰에서 소박하게 하고 싶었지만,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혼여행지는 부산 호텔로 정했다.
신축 건물로 한국에서 가장 현대적인 호텔이었다.



당시 해운대는 ‘개발’이란 말조차 생소한 지역이었다.


작은 건물들 사이로 4km의 백사장만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호텔을 바라보며 선미에게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호텔을 직접 지어보겠소.”


신혼 첫날밤,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태웠다.



신혼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 그대로였고,
가전이나 물건도 새로 들이지 않았다.



“지금 있는 것으로 충분해요.”
선미도 동의했다.



나는 선미에게 부동산을 가르쳤다.
한강변의 아파트 부지 주변의 땅을 매입하라고 조언했다.
이후 선미와 김 비서는 본격적으로 부동산 업무에 뛰어들었다.



나는 서울시의 땅과 건축계획 분석에 집중했다.

곧 나는 승진했다.


서울시 내 건축과 개발에 있어, 내가 모든 흐름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땅’은 셀 수 없이 많은 돈을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나는 공군 헬리콥터를 타고 한 시간가량 서울시 전역을 직접 확인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대부분 녹지였다.


한강 이남은 온통 갈대밭이었다.


그 이유는, 아직 한강 제방이 완전히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제방 공사를 통해 강남과 강북을 확실히 구분할 계획이었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투입될 것이고,

이는 곧 정부 예산, 즉 국민의 세금이었다.



이 공사는 H건설에 단독으로 맡겼고,

그 대가로 상당한 커미션이 돌아왔다.



중앙정보부까지 상납이 이어졌다.

나는 실무자 자격으로 따로 돈 상자를 받았다.



지금까지 받은 돈은 모두 땅을 매입하는 데 쓰였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부정부패의 나라다.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시대.

이나라 정권 아래, 깨끗한 기업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 속에서 나만 고고한 척, 청렴한 척 해봤자
결국 나 하나만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같은 배를 탔다.


한강 제방뚝 공사는 몇 해가 걸릴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쌀자루와 모래자루로만 임시 제방이 조성되어 있다.



신혼생활은 그야말로 달콤했다.
무엇보다 장인어른께서 이젠 친아버지처럼 편안한 존재가 되었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기꺼이 나서서 도와드렸다.



선미는 외동딸이다. 장인어른은 훗날 자신의 사업체를 나에게 물려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제 힘으로 기업을 세우겠습니다.” 나는 분명한 포부를 밝혔다.



선미와 나는 달콤한 나날을 보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1968년 가을, 한국에 온 지도 벌써 4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오직 ‘땅을 사는 일’뿐이었다.

단 한 평도 판 적은 없다.


한강 제방 공사는 어느 정도 진척 중이었다.
강남에 사무실을 열었고,

선미는 그곳의 사장으로 부임했다.


5명의 부동산 직원들과 함께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강남 일대의 땅을 꾸준히 매입했다.
그 면적만 무려 500만 평이 넘었다.



나는 일본에서 들여온 자산의 70퍼센트를 갈대밭과

미나리밭이 펼쳐진 강남의 논밭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어느 해 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강남의 땅값이 자연스럽게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강북 한강변에 주택과 소규모 건물이 들어서며,

서울시가 해당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축 승인을 내주고 있었다.

그 모든 흐름이 의도된 유도였다.



동시에 서울시는 한강 제방을 구축하고,

강남 건설에 대한 계획들을 언론에 흘리기 시작했다.



2차선 다리가 여럿 신설되며, 강남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나의 기획이었다.



나는 가진 모든 돈을 강남의 땅에 투자했다.


강남에 500만 평, 강북에 약 30만 평 정도를 확보했다.
당시 기준으로, 강북의 1만 평과 강남의 100만 평의 가격이 비슷할 정도였다.



그만큼 강남과 강북은 시장 가치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1970년, 나는 서울시청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5년 넘게 몸담았던 관직을 떠난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1971년에 강남 도시개발계획이 공식 발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부적으로는 도시계획이 모두 수립된 상태였다.

아니 중앙정보부가 계획중인 일이다.



시청을 떠난 후, 나는 강남에 두 번째 부동산 사무소를 개설했고,

직원 10명을 두어 오직 ‘땅 매입’에만 집중시켰다.



장인어른 역시 나의 의지를 이해하고,

별도로 부동산 사무소를 열어 1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한강 이남의 서울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강남의 허허벌판을, 우리 손으로 채워갔다.


서울시청을 떠난 이후에도, 중앙정보부는 나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지지자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가장 많은 ‘상납금’을 바쳤기 때문이다.



1971년 2월, 강남 도시개발계획이 발표되었다.
그날, 장인어른과 선미, 그리고 나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보유한 부동산은 이제 금전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자식을 두지 않았다.

아니 아이가 생기지를 않았다.
내가 죽고 나면, 이 엄청난 자산을 물려줄 이가 없는 것이다.




이후로 대한민국에서는 “부자가 되려면 땅을 사야 한다”는 말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이 흐름은 지방까지 확산되며, 전국의 땅값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부동산 시장의 ‘작은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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