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바다
통영, 내 나이 열넷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전상’이라 불렀고,
학교에서는 일본 이름 ‘렌 타케노신’이라 적힌 출석부를 보며 이름을 불렀다.
창씨개명이 일상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대다수 조선인들은 여전히 본래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다.
억눌린 이름 속에서 우리는 고개를 들고 서로를 기억했다.
나는 통영중학교에 다녔고,
교복 대신 기모노를 입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나는 태어나서 일본인이었고, 내가 생각하는 통영은 일본 땅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34년이 지난 세월이었다.
우리 집안의 모든 장식은 일본풍이었다.
아버지는 이러한 것에 대해 어머니의 반대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는 군수집에 출근할 때 기모노와 정장을 번갈아 입으셨고,
어머니 역시 기모노와 서양식 정장을 자주 입으셨다.
한복 스타일의 옷을 입은 모습을 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우리 집의 생활 수준은 중산층 이상은 되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뇌물을 많이 가져다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는 군수집에서 20여 년 넘게 통역과 집사 일을 맡았고,
일본인들도 아버지의 충성도를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통영은, 행복한 우리가정이고,
나에게 한없이 사랑으로 대해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이다.
세상에서 내 첫마디는 어머니에게 배운 일본말이었다.
통영 바다는 학교에서 걸어서 삼백 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다.
하굣길엔 늘 짠 바다 내음이 따라왔고,
바닷가 모래 위를 걷다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조용히 파도 속으로 사라질 듯 느껴졌다.
우리 가족은 통영 군수의 집에 깊이 얽혀 있었다.
어머니는 처음 군수집에서 일본인 하녀로 일했다.
부모님은 이곳에서 20년 넘게 일본인들과 함께 지내왔고,
나는 그런 부모의 영향으로 일본어를 제2의 모국어처럼 익혔다.
어머니가 일본인이었기에 더 빨리 배운 것도 사실이다.
나처럼 유창하게 일본어를 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통영에서 조선인 중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일본 순사 두 명이 늘 아버지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사람들은 우리를 두고 친일파라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아무도 아버지 앞에서는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는 군수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수장의 ‘손’이었고,
통영의 배신자, 매국노, 친일파의 수장이었다.
1944년, 내 나이 14살.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자라면서 가장 먼저 기억하는 사람들은 일본인 군수의 가족이었다.
내가 여섯 살 때, 군수는 자식이 없었고,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해 주었다.
그가 떠나기 5개월 전, 부인이 본국으로 귀국해 아들을 출산했다고 한다.
임신 당시 우리 가족에게 선물도 많이 주었다.
일본은 미신이 발달한 나라여서,
부인이 임신한 데에 나의 역할이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어린 나에게 그 모든 현실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일본식 목조건물에서 살았고, 정원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주위에는 조선 시대 양반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고요함과 위엄이 감돌았다.
일본 군수의 배려로 이런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었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다.
일본에서 가져온 소설 책과 신문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 일본은 나에게 많은 꿈을 심어주었다.
나무 조각을 깎으며 마음속 언어를 형태로 만드는 일이 즐거웠다.
그때의 통영은 바다보다도 더 깊은 기억의 골짜기였다.
가끔은 어머니와 함께 바닷가를 걷거나 숲속 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 해저터널이 가장 유명한 장소였다.
어머니는 조용한 일본 여인이었고,
내게 일본의 옛 전설과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말은 언제나 부드러웠고, 나는 그 속에서 먼 바다를 꿈꾸었다.
그 시절, 우리 곁에 새로운 군수 가족이 도착했다.
군수는 동경에서 부인과 딸을 데리고 왔고, 딸은 나보다 한 살 많았다.
그녀의 이름은 사유리, ‘작은 백합’이라는 뜻을 가진 차분하고 단정한 소녀였다.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지만, 자주 만나면서 친해졌다.
내가 일본어를 본토 사람처럼 하니 더욱 가까워진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사춘기였다.
사유리는 대부분 기모노를 입고 다녔고,
어떤 날은 하얀 원피스를 입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 본 가장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무사의 피를 이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한국어 선생 노릇을 했다.
사실 아버지, 어머니, 나는 군수집 통역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수 가족은 천주교 신자였고, 우리 가족 또한 함게했다..
일제하에서는 불법이었기에,
우리는 매주 군수댁 거실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조선 하인과 일본 주인이 한 공간에서 신 앞에 무릎 꿇는 그 풍경은,
아이였던 내게 인간의 평등이라는 개념을 처음 심어준 순간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아직 죄와 증오가 무엇인지 모르던 나이였다.
바다처럼 넓고 기억처럼 깊은 시간 속에서,
나의 14살 사춘기 시절은 그렇게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