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운 날들
카페 안으로 들어가니 그녀가 일어나 나에게 인사를 한다.
“처음 뵙네요. 말로만 들었는데…”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하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1억입니다.”
“왜죠?”
“저희 엄마가 암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3년이 넘었어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는 분명 이혼했다고 말했는데…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녀는 무릎을 꿇으며 울먹였다.
“언니, 부탁드릴게요. 떠나주세요. 아버지한테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저, 10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하고는 이야기 다 된 거니?”
“네.”
“좋아. 아버지께 오늘 중으로 정산금 정리해서 입금해달라고 하고, 앞으로는 전화하지 말라고 전해라.”
나는 봉투를 들고 카페를 나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
딱 한마디, ‘기분 더럽다’는 말이 맞았다.
나는 정말 몰랐다.
식당 사장이 ‘부인 없다’던 말을 믿었으니까.
공원에 주차를하고 우산을 쓰고 걸었다.
말로 표현할수 없는 마음이다.
내리는 비도 그리 반갑지도 않다.
머리가 복잡했다.
시간을 보니 오후 3시. 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근하고 소주 한잔하자.”
그런데 가은은 지금 바로 온다고 했다.
결국 5시 30분에 삼겹살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남는 시간엔 사우나에 가서 땀을 좀 빼기로 했다.
머리가 맑아졌다.
도착해보니 5시 20분.
그때, 검은 외제차가 식당 앞에 멈췄다.
기사가 문을 열고 내리니 가은이었다.
“이게 뭐야, 가은아? 이 그림은 또 뭐니?”
“언니, 미안해. 사실대로 말 못 했어.”
가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아버지는 대규모 병원장이었고, 어머니는 이사장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형 병원이다.
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되어 시골 요양으로 내려가자 어머니도 함께 내려갔고,
결국 지난달 가은이 이사장직에 올랐다는 것이다.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가은은 내가 식당 사장과 어떤 관계였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언니, 병원 입구에 있는 식당 계약이 이번 달로 끝나요. 할 사람이 없거든요.
가게는 큰데 손님이 없어서 적자예요. 좋은 조건으로 맡아보실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술이나 한잔 하자.”
삼겹살과 소주를 마시며 두 시간을 보낸 뒤,
가은은 내일 병원에 들르라 하고 떠났다.
다음날, 병원에 도착했다.
1층에 자리한 식당을 둘러보니 테이블이 30개 정도.
지금은 장사가 안 돼 보였지만, 내 눈에는 기회가 보였다.
“여기서 24시간 감자탕집을 하면 대박 날 것 같아.”
가은은 조건을 내게 맞춰주겠다며 부탁을 하나 했다.
“언니, 저 자문위원 해주세요. 급여도 드릴게요.”
“내가 의사도 아닌데 무슨 자문을…”
“병원 자금 흐름 관리요. 엄마가 돈 관리 잘하라고 당부하셨어요.”
결국 나는 3년 계약서에 서명했다.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반값에 가까운 임대료, 필요하면 병원 대출도 가능했다.
그날 저녁, 부모님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병원 식당 이야기를 꺼내니 다들 기뻐했다.
나는 부모님 집 근처에 전세집을 얻었다. 벌어 산 집이라 더없이 행복했다.
며칠 뒤, 이사한 집에서 가은과 삼겹살 파티를 하고 밤새 술을 마셨다.
그리고 드디어, 감자탕집을 열었다.
24시간 영업, 주방 2명, 서빙 3명,2교대이다.
3개월이 지나자, 돈이 벌리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이 크다 보니 보호자, 가족, 간호사, 의사 모임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월평균 순수익은 4천이 넘었다.
그렇게 1년을 운영하던 어느 봄날 저녁,
비에 젖은 채 미진이 가게로 들어왔다.
수건을 건네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뚝뚝 흐르는 눈물 속에서 그녀는 말했다.
“나, 이혼했어. 남편이 코인 사기로 구속됐어. 가진 돈 다 날리고, 집도 넘어갔어.”
나는 식사를 내왔다. 그녀는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오늘 처음 먹어봐?”
“응.”
그녀의 사연은 처참했다.
열흘간 친정집에 머물렀다고 했다.
“상희야, 나… 너 밑에서 일 배우고 싶어. 뭐든 시켜만 줘. 최선을 다할게.”
나는 지갑을 열어 현금 200만 원을 꺼냈다.
“이걸로 옷도 사고 화장품도 사. 내일 예쁘게 하고 점심에 와.”
다음날 아침, 나는 이사장실로 갔다.
가은에게 미진 이야기를 전하며 말했다.
“지난 3년간 병원 수입·지출 서류, 원무과에 말해서 1시까지 이사장실로 가져다 줘.”
가은은 곧바로 원무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2시까지 가져오세요.”
점심 무렵, 미진과 가은이 함께 들어왔다. 셋이 점심을 먹은 뒤 나는 미진에게 말했다.
“너 은행 오래 다녔잖아.
이사장실 가서 서류 검토 좀 해봐. 오늘 집에 못 들어가면 엄마한테 전화해 주고.”
미진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대출팀 있었잖아. 이런 건 자신 있어.”
그렇게 미진은 가은을 따라 이사장실로 들어갔다.
저녁, 나는 국밥을 싸 들고 이사장실에 들렀다.
미진은 수많은 서류 더미를 펼쳐놓고 집중하고 있었다.
“뭐 보이니?”
“외관상으로는 금액은 맞는데. 그런데… 돈이 빠져나간 심증이 보여.
내일까지 확인하면 구체적인 걸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수고해. 난 열 시쯤 퇴근할 거야. 배고프면 식당 가서 밥 먹고.”
나는 믿었다.
미진은 본인도 먹고살아야 하니, 뭐라도 반드시 찾아낼 거였다.
다음날 아침 9시, 이사장실에 들어가 보니 미진은 여전히 서류를 검토 중이었다.
“대략은 찾았어.”
“뭔데?”
“병원 물품이 부풀려져 있고, 없는 직원 급여가 12명분이나 있어.
급여 내역은 몇 년째 맞지 않고, 급식도 부풀려진 것 같아.
오후에 직접 원무과장을 만나 확인해볼게.”
“그래, 그럼 점심 전엔 좀 쉬고 샤워도 하고 와.”
“응.”
그날 밤 늦게까지 미진은 서류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밤 9시가 넘었는데도 원무과장이 퇴근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가은이 그를 이사장실로 불러들였다. 나는 옆에서 지켜봤다.
“과장님, 저한테 하실 말씀 없으세요?”
침묵이 흘렀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하시면 참작해드릴 수 있어요.
내일 법무팀에 넘기면 저도 도와드릴 수 없어요.”
결국 원무과장이 무릎을 꿇었다.
“…대표 원장님이 시켜서 했습니다.”
미진이 물었다.
“제가 본 대로 다 맞습니까?”
“네. 정확합니다.”
“언제부터?”
“대략 2년 전부터요.”
“금액은?”
“40억 정도 됩니다.”
“누구랑?”
“병원장하고… 저, 그리고 원무과 직원들까지.”
가은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일 마무리되면 원무과장님은 명예퇴직으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불만 없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다음날, 병원장 5명은 모두 자진사직서를 냈다.
그들은 40억을 전액 반환했고, 법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조건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다른 병원에 취직이라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원무과 직원들도 명예퇴직 처리되었다.
가은 아버지께 보고드리자, 미진에게 감사 인사를 꼭 전하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새 병원장을 청빙하고, 원무과 직원도 다시 뽑았다.
미진은 한 달간 임시 원무과장 직무대리를 맡아 일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셋이 함께 횟집에 갔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가은은 봉투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꼭 사례하라고 하셨어요. 손이 부끄럽지만… 각자 5천만 원씩 담았습니다.
앞으로도 저 도와주세요.”
가은이 봉투를 핸드백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가은, 미진, 나
우리는 병원 횡령 사건을 함께 수습하며 더욱 가까워졌다.
약속대로 미진은 오전에는 원무과 점검을 돕고,
낮 12시부터는 식당에서 써빙을 했다.
밤 10시까지 일하고, 다음 날 아침 7시 30분이면 다시 둘이 출근했다.
놀지도 쉬지도 않고, 일만 했다.
가은은 병원 급여에서 매달 우리 두 사람에게 각각 300만 원씩 지급했다.
미진은 원무과 관리 명목으로, 나는 이사장 자문위원 명목으로.
그렇게 병원 식당을 2년 반 동안 운영했다.
엄청난 성장을 이뤘고,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이 없었다.
남자를 만날 겨를도 없었다. 사실은… 남자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