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28살 그날의 빗소리

#심연의 세계

by 전태현 작가
ChatGPT Image 2025년 7월 4일 오전 10_22_10.png



그렇게 십여 일이 흘렀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비가 유난히도 잦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아버지가 차로 일찍 데려다 주신 뒤 출근하시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번거롭지 않게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젖은 우산을 들고 서성이는 것도,

차를 돌려 나를 태워주는 정성도 괜스레 미안해져서다.

샌들을 신고, 미니 청치마에 반팔 티 하나 걸친 채 집을 나서면,

회사에 도착해 근무복으로 갈아입는다.




내가 일하는 곳은 중고차 매장이다.

사장을 제외하고도 열 명 남짓한 개인 딜러들이 분주히 드나든다.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니, 단정한 근무복은 필수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책상 정리를 한다.



화장실과 사무실 바닥은 전날 퇴근 전에 청소를 마쳤으니,

아침에는 간단한 정돈만으로도 충분하다.



대부분의 업무는 컴퓨터로 진행되며,

자동차 이전 서류만큼은 내가 직접 구청에 다녀와야 한다.
일이 벅차거나 힘들지는 않다.
다만, 가끔은 ‘조금만 더 시켜주고, 조금만 더 보수를 올려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스치곤 한다.



점심은 단지 안의 구내식당에서 먹는다.
대부분 혼자다.
다른 이들은 손님을 만나거나 영업을 나가기 때문이다.
가장 한가로운 날은 언제나 비가 오는 날, 바로 오늘과 같은 날이다.




사장님은 쉰을 훌쩍 넘긴 연배로, 경력만도 이십 년이 넘는 베테랑이다.
풍문에 의하면 이미 큰돈을 벌어 안정된 생활을 한다고 했다.
우리 회사는 주 5일 근무제이다.

오후 다섯 시 반이면 청소를 시작해, 여섯 시 정각에 퇴근한다.
토요일에 나오면 수당을 더 얹어준다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급여도 충분하다고,

아니, 충분하다고 여겨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집은 버스로 일곱 정거장 거리이다.

날씨 좋은 날은 걸어서 출퇴근하기에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요즘은 장마라, 크고 작은 비가 쉼 없이 이어진다.
비가 내리면 이상하게도 마음도 함께 눅눅해지고, 우울해진다.



오늘처럼 손님 없는 날, 사무실엔 나 혼자뿐이다.

나는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그때였다. 불현듯, 그 오빠가 떠올랐다.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 수차례 망설이다 결국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혹시, 기억하시나요?”


‘그럼요. 기억하죠.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대답했다.

“고마워서 식사라도….”
“일하는 데 근처라면 내가 태우러 갈게.”



우린 6시 15 분에 만나기로 했다.
마침 다행히도 오늘은 미니 청치마에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한 터라,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을 상황은 고려하지 않아도 됐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설렘일까?

아니면 두려움일까.



아이를 키우느라 누구를 만나본 적도, 그럴 여유를 가져본 적도 없었다.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시계를 보니 오후 4 시. 사람도 없으니 서둘러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퇴근은 6 시, 정해진 시간이 변할 리 없다.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고쳐바르고 나니 6시5분.
밖에는 이슬비가 내렸다.



큰 도로를 건너니, 그가 차에서 내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우린 악수를 나눈 뒤 차에 올랐다.



“뭐 먹고 싶어?”
“아니에요, 제가 대접할게요.”
“괜찮아. 오빠가 살게.”
“그럼… 싼 걸로 먹어요. 저는 아무거나 잘 먹어요.”


우린 고깃집으로 향했다.
마주 앉아 얼굴만 보아도 웃음이 터졌다.



고기를 굽다, 그의 입에 한 점 정성스레 집어 넣어주었다.



소주를 마시며 웃고 떠드는 동안,

문득, 마치 철없는 총각·처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소주 두 잔을 마셨고, 나머지는 전부 내 몫이었다.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빠의 독백



나는 전북 임실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옥정호수가 있는 곳이다.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보내고, 군 전역 후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일했다.
스물넷의 나이였다.



그 무렵, 옆 가게에는 서른여덟 살의 과부가 있었다.

돈 많은 여자였다.
우린 동거를 했다. 그녀는 돈을 아낌없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감당하지 못했다. 코피가 나고, 몸이 상해갔다.
결국 어느 날, 짧은 편지 한 장 남기고 도망치듯 떠나왔다.

그 뒤엔 공장에서 일했다.



사장님이 퇴근 후 왈츠를 연습하는 걸 보았다.
나는 그의 파트너가 되어 춤을 배웠다.
1년쯤 지나자, 공장 근처에 댄스스포츠 학원이 생겼다.



왈츠, 룸바, 자이브, 탱고… 마치 영화 바람의 전설 속 주인공이 된 듯,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학원으로 달려갔다.

스물여덟 살 무렵, 학원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마흔 살의 여자였다.



헤어졌다가 4년 전 다시 만났고,

그녀에게 돈을 빌려 핸드폰 가게를 열었다.


지금시세는 시설비와 권리금만 5억, 보증금 1억, 월세 500만 원.
지금은 직원이 다섯이나 된다. 4년간 돈은 꽤 벌었다.

그녀와의 인연은 올해 연말로 끝난다.



4년 전, 그녀가 3억을 빌려주었고,

나는 그 의리를 끝까지 지킬 생각이다.



지금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러 미국에 갔다.

12월이나 내년 1월쯤 귀국한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 같았다.

“그 여자, 그렇게 돈이 많아요?” 내가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서울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사막의 모래알보다 많다.”



그 표현에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미혼모라고.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일요일에 드라이브 가자고 그는 제안했고, 나는 기꺼이 수락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니 10시.
내일은 토요일, 아이와 하루를 보내고, 일요일엔 다시 그를 만나러 가야지.



일요일 아침, 부모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열 시 반쯤 반지하 집으로 돌아왔다.



11시 30분에, 오빠가 기다린다고 했다.

흰색 원피스 스커트를 입었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이다.



머리는 드라이로 정리했고, 액세서리는 귀걸이 하나뿐이다.
평소엔 굽 높은 신발을 꺼리지만, 오늘만은 키가 커 보이고 싶었다.



사거리로 나가니, 그는 비상 깜빡이를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좋은 느낌이었다.



사실 어색할 사이도 아니다.
처음 본날 이미 초야를 치른 사이다.
그땐 술기운에 가능했지만, 오늘은 맨 정신이다.



차로 40분쯤 달렸을까.

우리는 경기도 근교의 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정원은 잘 다듬어진 조경으로 단정했고,

창밖으로 펼쳐진 전망은 고요하면서도 우아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런 곳은, 내게 처음이었다.

신기했고, 아름다웠다.

점심은 스테이크였다.



고기를 썰어 입에 넣는 순간, 내 안의 긴장도 조금은 풀렸다.
식사가 끝나고,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을 때였다.



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리… 애인 사이로 지내면 어때?”


순간 숨이 막히는 듯 했다.
그는 덧붙였다.

“대신 일주일에 한 번만 보면 돼요.”


나는 얼떨결에 물을 들이켰다.

“그 돈이면 젊고 예쁜 아가씨들 얼마든지 만날 수 있잖아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 마음은 다 취향이 있거든.”


그리고는 조용히 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수표 여섯 장, 장마다 백만 원씩. 총 6백만 원이었다.

“오늘 반 주고, 여섯 달 뒤에 나머지 반 줄게.

대신 전화나 문자로 서로 귀찮게 하지 않는 조건이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하게, 몸은 움직이지 않는데 마음은 흔들렸다.

그날부터, 우리는 연인이라 불릴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늦은시간 사거리에서 그는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근처 편의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평소에는 거의 피우지 않던 담배였다.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당겼다.



첫 모금의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나는 속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야, 최상희. 너 미쳤니?”



스스로에게 욕을 퍼붓고, 이마를 툭 치듯 내리쳤다.
가방 속 봉투를 다시 꺼내 펼쳐보았다.



차곡차곡 쌓인 수표가 눈앞에 놓이자, 또다시 흔들렸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밤은 깊었다.



그와의 다음 만남은 토요일이 될지, 일요일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금요일에 연락하겠다고 했다.

연인이 되어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나는 매주말이 기다려졌다.
이토록 누군가와의 약속을 기다린 적은 없었다.
마치 남자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다.
사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그가 내게 선물한 것은 단순한 봉투가 아니었다.



스무 살의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낯설고도 묘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7월 하순, 장마는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전 01화제1화. 28살  그날의 빗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