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마지막 왈츠
가족에게 한 달쯤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서른아홉의 가을, 9월 1일 월요일이었다.
미진을 만나 대전 근처의 땅을 둘러보기로 했다.
일주일 동안 차를 몰며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특별히 마음을 사로잡는 곳은 없었다.
그저 좋은 호텔에서 잠을 자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풍경을 스치듯 훑고 다닌 셈이었다.
미진은 부모님 일을 도우러 떠났고,
나는 전주에 있는 오빠에게로 향했다.
오빠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2층에 왈츠 학원을 열었다고 했다.
세 달 전 문을 열었다고 하니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중일 것이다.
임실 옥정호수 근처에는 작은 펜션까지 매입해 운영한다 했다.
나보다 열두 살 많은, 올해 쉰한 살이 된 오빠.
세월이 참 빠르다.
식당 앞에 차를 대고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저녁 여덟 시,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오늘만큼은 오빠와 원 없이 왈츠를 추고 싶었다.
전화는 미리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근처를 산책하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오빠가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오빠, 배고파. 밥 사줘.”
“그래, 뭘 먹고 싶니?”
“참치.”
근처 참치집에서 우리는 술을 원 없이 마셨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한 잔 더 기울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아침 일곱 시.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럽다.
지하 사우나에 들러 몸을 씻고,
여덟 시 반 속풀이 해장국으로 속을 달랜 뒤 오빠 가게로 향했다.
직원들이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었다.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정오이다.
앞치마를 두르고 써빙을 도우니 손님들이 나를 알아보았다.
그 작은 인정이 왜 그리 기쁘던지.
오후 두 시, 2층 학원에 올라가 두 시간 동안 사랑스러운 남자와 왈츠를 추었다.
왈츠는 잠들어 있던 내 세포를 흔들어 깨우는 춤이었다.
오빠는 단 한 번도 먼저 전화를 걸어온 적이 없었다.
늘 내가 먼저 연락했다.
학원에는 세네 명 남짓의 수강생이 있었다.
돈벌이보다는 취미와 삶의 여유가 먼저인 공간이었다.
남자 수강생들과도 함께 춤을 추고, 저녁을 먹으며 일주일을 보냈다.
남들 눈이 있으니 밤에는 호텔에서 잠을 잤다.
오빠에게 대전 근처의 땅 이야기를 꺼냈다.
“나쁜 생각은 아닌데… 거기다 뭘 할 건데?”
나는 속으로만 웃었다.
그렇게 식당에서 써빙하고, 오후에는 왈츠를 추며 일주일이 순식간에 흘렀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은 오빠의 펜션에서 단둘이 지냈다.
그 시간은 황홀했다.
내 인생 최고의 날들이었다.
오빠와 함께 잠든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장작불에 고기를 구워 먹고, 옥정호수의 푸른 물결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밤마다 오빠는 나를 사랑해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찾아왔다.
돈이 많아도,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세종시로 향했다.
호텔을 15일 예약하고, 두 눈으로 직접 살펴보기로 했다.
아침 8시에 식사하고 하루 종일 드라이브,
저녁이 되면 밥 먹고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잠드는 생활이다.
12일째 되던 날, 뭔가를 발견했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양떼목장이었다.
차를 주차하고 걸어 들어가니 가을날의 낙엽이 바람에 부서지고 있었다.
70대로 보이는 노부부가 양들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나는 인사를 건넸다.
“경치가 좋아서 구경 왔어요.”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았다.
“혹시… 최상희 씨?”
“네, 제가 최상희입니다.”
셋이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래는 소목장이었는데 민원이 많아 양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노부부는 늙어서 양들 돌보는 재미로 살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땅을 팔라고는 하지만, 싸게만 사려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멀리 아파트 단지와 정부 건물이 보였고, 그 사이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다.
앞에 보이는 논밭만 해도 노부부의 소유가 만 평이 넘는다고 했다.
목장은 9만 평. 서울에 사는 교수 부부 아들이 주말마다 내려와 도와준다고 했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얼마면 저한테 파시겠어요?”
노부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곧장 제시했다.
“300억 드리겠습니다.”
노부부가 놀랐다.
“아니… 그렇게 많이…”
“파시겠어요?”
할머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은 팔라고 했다.
곧 내려오겠다고 했다.
두 시간 뒤, 아들 부부가 내려왔다.
둘 다 교수라 했다.
노부부의 말과 같은 내용을 다시 들었다.
그 자리에서 인터넷으로 등기를 확인하고, 계약금 30억을 입금했다.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일주일 뒤 잔금을 치르고 나는 11만 평의 대농장주가 되었다.
미진을 불러 앞의 땅을 100억 더 매입하라고 말했다.
그해 10월, 미진과 나는 양떼목장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부동산 업자 5명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양은 50마리만 남기고 다 팔았다.
처음에는 300마리였는데 감당하기 어려웠다.
“둘이서 50마리 밥 주면 되겠지…”
중간에 논밭도 3달 동안 120억을 들여 매입했다.
노부부가 살던 집은 인테리어만 조금 손보고 그대로 살았다.
논과 밭은 임대를 주었다.
통장에는 대략 70억이 남았다.
밭 한쪽에 2층 대형 커피숍을 지을 계획이었다.
3천 평을 갈아엎고 조경하며 돈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마흔이 되던 해 2월, 커피숍이 문을 열었다.
420억 원어치의 땅을 산 셈이었다.
나는 부모님 댁을 오가며 지내기로 했다.
땅은 기다리는 것이다.
2월 중순, 임실 오빠의 펜션으로 향했다.
세 달 만이었다.
그런데 오빠의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있었다.
대장암 말기라는 소식.
밤새 울었다.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오빠는 아픈 몸으로 나에게 한곡의 왈츠를 선물했다.
내 인생의 은인이다.
임종만큼은 지켜보고 싶었다.
꽃 피는 3월 말, 오빠는 세상을 떠났다.
뜨거운 불꽃 속에 관이 들어갈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울었다.
지구 전부를 잃은 느낌.
세상에 핵폭탄이 천 발은 떨어진 듯한 공허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나에게 왈츠를 알려주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오빠였다.
“사랑해, 오빠.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을게요.”
그렇게 세종으로 돌아와 한 달 가까이 두문불출했다.
양 밥을 주고, 똥을 치우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커피숍에도 내려가지 않았다.
우울증 같은 것이 내 정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5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