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명백한 흔적

by 박재옥 시인


부여 정림사지 빈터에 까마귀 내려앉는다

구구절절 나라 잃은 검은 비문(秘文)인 양

바닥에다 알 수 없는 전언들을 써내려가다가

누가 볼까봐 황급히 날아오른다

천 년 넘도록 망도(亡都)를 지키고 서 있는 오층 석탑이

멀리서는 바랑지고 탁발하러 가는 늙은 중의 뒷모습 같더니

가까이서 보니 기골 장대한 백제의 사원이었구나

눈물의 돌들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기단과 탑신이

한 채 한 채 그들의 집이었구나

이 얼마나 풍성한 가구(家口)들인가


회한의 강 건너 마을에서 살았던 백성들이

왜 아름다웠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흔적

풍찬노숙의 비바람으로도 지울 수 없었던

숨골처럼 콕 박힌 흔적

근방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순박하고 정 많은 연꽃의 사람들

그들이 퍼주는 푸근한 미소

백제의 피는 아직도 마르지 않고 수맥처럼

마을 밑을 흐르고 있었구나

숙연하다, 흥망의 국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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