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무너진 산성

by 박재옥 시인


옛사람들, 맨 몸으로 오르기에도 힘든

높은 산에 성을 쌓고 무엇을 지켰을까

목숨이나 재산 말고 더 귀한 무엇이 있었는가

무너진 축대, 뒹구는 석축 위에 돋아난

세월의 검푸른 이끼가 지나간 연대의 소멸을 증언하는 듯하여

허망한데, 예나 지금이나 이 성을 지키고 있는 건

오갈피나무를 흔들고 가는 불멸의 바람뿐인 듯

산등성이 휘감고 돌아간 이 정도 위용이면

옛사람들 성취도 자랑도 대단했으련만

성이 무너지고서 꺾였던 맹신의 깃발은 지금 어디에 묻혀있는가

허망한 조락(殂落)의 세월을 읽었는지 못 읽었는지

후세의 등산객들 성에 올라서

저 빛나는 순은의 억새숲 좀 보라고 야단인데

이 성 무너지고서 치욕의 하늘을 보았을

눈망울들은 어디에서 숨죽이고 있는가

지금 흔한 것은 기념비적인 유적 안내판의 상찬과

관광명소의 관인 도장에 팔려나가는 조잡한 기념품들뿐

통한을 베고 죽은 장수의 뜨거운 눈물샘이 터져

어느 골짝에선가 온천이 솟았다는 말, 정말일지 몰라

지금은 성이 필요 없는 시대,

그 누가 자신을 가둘 성을 쌓으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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