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을 포기한 배추들이
겨울 들판을 무덤으로 만들었다
어디에도 아프지 않은 무덤은 없을 터
누가 누구의 죽음을 탓하겠는가
이곳에선 죽음보다 삶이 더 혹독한 것을
상심이 너무 큰 탓인지
갈아엎을 분노도 치욕도 치밀어오르지 않았으니
수압처럼 차오르는 허탈감을 견디는 방법은
모든 외면과 방치뿐이었는지도
남모르는 긴 한숨으로 겨울 계곡처럼 돌아앉은
우리들의 아버지는
죽은 배추들을 줄 세워 치욕의 묘비를 세우거나
시퍼런 절망의 영토를 늘일 계획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마처럼 낮게 내려앉은 겨울 하늘을
부끄럽게 만들 의도조차도
봄이 오면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꽃샘바람 같은 생명의 경구를 읊조리면서
다시 밭에 나가서 게 눈 같은 씨 뿌리게 될 것이므로
추운 겨울이 승냥이 떼처럼 몰려오기 전에
한 포기라도 더 뽑아간 이들이
어쩌면 진정한 식탁의 승자였던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