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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떡믈리에 Sep 21. 2022

무진장 좋아했다. 떡볶이 말고 너.

무진장떡볶이에서 바싹 졸인 내 청춘




왜 나를 만나자고 할까?


그녀가 나를 만나자고 한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었나? 내가 무슨 말을 했지? S군은 아찔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그에게 그레고리 맨큐 경제학 교재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좋은 외모가 주는 프리미엄은 경제학적으로 실존한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큰 키에, 하얀 피부,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균형 잡히고 오목조목 이쁜 이목구비. 웃을 때 드러나는 귀여운 덧니. 좋은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지. 그러나 거기에 그의 주관이 개입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며 그를 보고--사실 그를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웃어줬을 때까지 대략 1분 15초 정도 그는 객관적일 수 있었다.


그녀는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그럴 자격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름다웠고,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었고, 거듭 말하지만 아주 아름다웠으며, 늘 미소를 잃지 않았고, 정말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녀를 둘러싼 세상의 일면은 평화롭고 화목했고, 다른 일면은 치열한 동물의 세계였다. 그녀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다들 화목했고 친절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무수한 암투가 진행되었다. 선배, 동기, 후배 가리지 않고 구애의 경쟁이 번잡했다. 이런저런 소문이 만들어지고 퍼져나갔지만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던 것인지 그가 가슴 아파할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는 가슴 아파할 자격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애초부터 기권한 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에 빠진 것 같았지만 빠지지 않은 것도 같았다. 사랑한다고 해서 꼭 사랑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별히 고고한 척을 하려던 건 아니지만 남들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마치 좋은 음악을 발견한 것 같은 사랑이었다. 에디 히긴스의 'Shinjuku Twilight'을 처음 들었을 때와 같았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두근거린다. 꼭 내가 그 곡을 연주해야 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그 곡을 듣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같은 수업을 들으며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좋았다. 가끔 마주쳐서 인사를 하는 것도 좋았다. 그녀의 시원한 미소를 마주한 날은 하루 종일 행복했다. 연주가 시작되고 마칠 때까지의 4분 48초, 그 시간 동안에도 행복하지만, 연주가 끝난 그 이후로도 쭉 행복한 것처럼.


그렇게 방학을 맞이했다. 학교와 제법 떨어진 곳에 살던 그는 굳이 학교에 가지 않았고 만화와 게임에 묻혀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그에게 그녀는 '존재'임에도 '사건'에 가까웠고, 방학으로 인해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불편하지는 않았다. 생각은 났지만, 마주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의지가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그렇게 3주가 지났을까. 갑자기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통에 눈도 흔들리는지 전화기를 쥐기 위해 몇 번을 더듬거렸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만 머릿속에 새하얘지는 통에 무슨 말을 나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노래 제목을 생각해 내는 것처럼 애처롭게 기억을 쥐어 짜냈다. 그래. 그녀는 방학이라 알바를 하고 있는데, 동기들을 통해서 알바 장소 근처에 그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알바가 오후 중에 끝나는데, 괜찮으면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뭐가 그리 어려운 문제였나 싶지만, 당시에는 쉬운 문제가 주는 함정에 빠져 답을 내지 못했다. 이렇게 단순하다고? 그럴 리 없어. 다른 답이 있을 거야.


밤을 꼬박 새우고 맞이한 그날. 비가 내렸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지독한 가뭄이 찾아와 인류가 위기를 맞이한다 하더라도 지금 만큼은 맑게 개어달라 기도했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이 변하진 않을지,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향하진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아멘. 약간은 좌우로 기우뚱하며 성큼성큼 걷는 그녀 특유의 씩씩한 걸음걸이가 보였다. 그녀는 한 손을 머리 위로 흔들어 인사하면서 싱그러운 미소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다른 한 손에 들린 긴 우산이 그녀의 걸음에 맞춰 흔들릴 때마다 그의 심장은 그 박자에 맞춰 알레그로로 뛰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경쾌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녀가 인사했다. 밤새 꽤 다양한 시나리오를 연습했건만, 오랜만이라며 건네는 악수에 감전된 그는 그 이후로 그녀와 나눈 대화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건, 왜 그랬는지, 그는 그녀를 데리고 한 떡볶이집으로 향했고 그 떡볶이를 무진장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이후로 몇 번인가 연락해서 그 떡볶이집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떤 떡볶이집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그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소위 로컬 맛집이었고 주인 할머니가 연로하셔서 저녁 장사를 잘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녀는 떡볶이집이 닫고 나서야 알바를 마쳤다. 그에게 미션이 생겼다. '나는 그녀와 그 떡볶이집에 같이 가야한다.' ...뭔가 핀트가 잘못 맞은 것 같은데? 아마도 그는 어떤 판단을 자꾸 보류하고 싶었고 그래서 더 근본적인 질문을 피해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몰입했던 건 아닐까. 불가능한 미션에 대해 고민하며 짧게 짧게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그렇게 그가 군에 입대하기 전날까지 그들은 계속 만나지 못했다.


입대 전야, 동족상잔의 비극과 조국분단의 현실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극에 이른 그 순간, 그녀가 보고 싶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전날은 좀 달랐다. 극심한 분노와 극한 상황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녀에게 먼저 연락했다.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고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에게 가득 찬 건 용기라기보다는 분노였고 솔직함이라기보다는 단순함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약간은 버벅거리며 보고 싶었다고 말했고 그녀는 밝게 웃으며 잘 왔다고 반겨줬다. 그녀의 미소를 본 두 눈에서부터 시작된 어떤 기운은 두근대는 심장을 타고 흐르면서 그의 안에 가득하던 부정적인 기운들 온데간데없이 날려버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를 만나니 비로소 그가 다시 그로 돌아왔다. 그녀의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앉아서 둘은 또 한참 동안 떡볶이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그가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때도 자연스럽게 둘의 매개체는 떡볶이였다. 심지어 그는 계획에 없던--군생활이 어디 계획대로 되겠냐만--취사병이 되어 정신이 없었던지라 밥 짓는 이야기 말고는 적당한 화제를 찾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짬통을 노리는 고양이들과 싸우는 이야기 말고 무언가 공통의 화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떡볶이에 기대 보기로 했다. 그는 그가 취사병이 되어 이제 그 떡볶이집의 비밀을 알아냈다면서 자신했고, 그녀는 그런 그에게 휴가를 나오거든 꼭 요리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났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전해지는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졸업을 했고 취업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나, 그는 오랜만에 그녀의 연락을 받았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서 가슴이 뛰는 걸 보니 그는 아직도 그녀를 평범하게 생각하 않았나 보다. 그녀는 짧은 안부 인사 뒤로 결혼을 한다고 했고 청첩장을 주고 싶다고 했다. 아... 그는 무덤덤하게 답을 했지만 그전에 약간의 정적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충격받았냐며 놀리는 그녀의 장난에 멋쩍게 답하고 전화를 마쳤다. 충격이라고 말할 만큼의 고통은 아니었지만 명치 아래로 살짝살짝씩 답답함이 느껴졌다. 애가 탄다기엔 그보다 못한, 담담하다 말하자면 그건 너무 거짓말인 느낌.


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 어제부터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그는 '예전과 똑같네'하고 읊조렸지만, 차이가 있다면 예전과 달리 잠을 잘 자고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찌감치 나가서 그녀를 기다렸다. 실내에 앉아서 기다려도 됐지만 굳이 나가 있던 건 아마도 어떤 기억 때문이었다. 그에게 다가오던 그녀의 그림과 그녀가 데려왔던 어떤 음악에 대한 기억.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찌푸린 하늘 아래, 비가 고인 인도 위로, 여전한 미소를 가진 그녀가 나타났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주위를 밝혀주는 빛이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우산이 좌우로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미세한 템포마저도 그의 귀에는 음악으로 들려왔다. 살짝 지각한 그녀는 미안해하면서 미용실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둘러댔다. 


식사를 하던 중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오빠 아직도 떡볶이 좋아해요?

-응, 무진장 좋아하지. 


그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도 아직 떡볶이 좋아하지?

-아니요, 오빠 저는 떡볶이 좋아하지 않아요. ^^;


그는 그가 고득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다만 오답 사이에 몇 개 정도는 정답이 있다고 보았고, 몇 개는 부분점수라도 받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그는 문제도 잘못 읽었고, 긴 증명 문제에서는 전제를 다 잘못 잡았고, 서술형 문제에서는 논점을 일탈하고 있었으며, 객관식과 주관식을 가리지 않고 마킹까지 밀려 쓰고 있었다. 자애로운 채점관에 의해 재시험이 계속되었을 뿐. 


애초에 그의 사랑법은 비주류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간과한 것은 그의 사랑은 미숙했고 어떤 의미에선 이기적이었다는 것이다. 주지 않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주는 사랑은 받는 법을 몰랐고, 사랑을 줘야 할 때 주지 못했다. 물론 모든 사랑은 다 같은 것이 아니요 모든 사랑이 특정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기왕이면 남들처럼 사랑을 이루어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축하해줄 거죠?'라고 묻던 그녀의 말에 그러겠노라고 성공적으로 거짓말하며, 그의 청춘 드라마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래도 그렇게 작성된 그의 오답노트는 청춘을 갈아 바친 보물이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한 기록은 비록 그것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랑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몰라서든 실수로든 틀릴 수 있다. 같은 문제를 또 틀릴 수도 있다. 다만 오답노트를 계속 정리해 나간다면, 우리는 분명 전보다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살다 보 그런 문제 있더라. 몇 번을 연습해도 계속 틀리는 문제.


-혹시... 떡볶이... 좋아하세요? 저희 본가 근처에 무진장 맛있는 떡볶이 집이 있는데요. 그래서 이름도 무진장떡볶이에요. 즉석떡볶이에 토핑은 자유롭게 구성하는 방식인데 은근한 소스가 정말 일품이에요. 도화지에 물이 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퍼지는 감칠맛이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는 맛이거든요. 또 거기에 탕수 만두 곁들이면 그 만두 그게 상큼한 탕수 소스랑 조화를 이루는데... 거 왜 있잖아요 반대라서 더 끌리는 느낌? 제가 취사병 출신인데요... 아 근데 떡볶이 좋아하시는 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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