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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떡믈리에 Sep 01. 2022

분식트럭으로 달려가는 작은 짐승들

난이와 함께한 개포동 왕떡볶이의 추억




난이와 나는...

학원을 마치고 분식트럭으로 달려가는 것이 좋았다...

떡볶이

어묵

김말이

고구마튀김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어묵 국물은 엄마보다 푸근했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달려가서 무료 슬러쉬를 기다리는 것이 좋았다.

짐승처럼 말없이 서서

슬러쉬를 기다리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어두워진 대치동을 달리며 불빛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고춧가루와 뽀얀 어묵 국물을 불어가며

뭉게구름처럼 떠오르는 뽀얀 입김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가로수의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분식트럭 옆에 말없이 서서

떡볶이를 바라다보는 말없는 작은 짐승이었다...




올해로 마흔이 된 대치동 키드 K군, 딸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면서 도로변에 세워진 한 분식트럭을 발견하고 문득 과거를 회상해보았다. 90년대 초반,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때 우리는 짐승처럼 달리곤 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그때, 두툼한 가래떡 떡볶이를 푸짐하게 내주시던 분식트럭 사장님이 있었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대가 되면, 사장님은 더욱더 인심 좋은 떨이 세일을 하시곤 했다. 분식트럭을 갔다 오는 길에 타이밍 좋게 세븐일레븐에 들게 되면 무료 슬러쉬를 득템 하기도 했다.


같은 학원을 다니던 난이. 차마 널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그때, K군은 항상 그녀에게 츤츤거리며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떨이 세일과 무료 슬러쉬는 수줍은 터프가이였던 사춘기의 그로서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전하는 단 하나의 창구였고 다행히 그녀는 단 한 번도 안 된다는 말이 없었다.


국어 시간에 함께 배웠던 작은 짐승. 언젠가 멋지게 그 애에게 읊조리고자 몇 날 며칠을 혼자 외워봤던가. 반배치고사가 그들을 갈라놓은 그 날까지 K군은 끝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하였지만 그의 마음 한 켠에는 항상 그녀가 피워준 꽃송이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며칠 전 티비에서 '나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Definitely, Maybe , 2007년작)'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에서 라이언 레이놀즈는 딸에게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딸은 사랑스런 눈빛으로 그 이야기를 들어주더라. 그는 생각했다. 그래. 나도 내 전부인 그녀에게 언젠가, 수줍은 아빠의 사랑노래를, 이 시를 들려줘야겠다.




<작은 짐승>


 - 신석정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러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처럼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말없는 작은 짐승이었다




떨이 세일 기다리던 학생들은

자라서 가정을 이루었고,

인심 좋은 분식트럭 사장님은

성공해서 일가를 이루었다.

대치동 상가 거리 한복판의 개포동왕떡볶이.

모두가 인정하는 떡볶이의 명가.

양념을 가득 품은 앙큼한 가래떡이 입안가득 쫄깃쫄깃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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