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길만 스쳐도 인연을 살아낸다.
<피천득의 '인연' 중에서>
차라리 어리석은 사람이었어야 했다. 두 사람은 몰라봤어야 했다. 보통사람이었어야 했다.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쳤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너무 현명했다. 처음 만난 그 순간 두 사람은 어디선가 만났었던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두 사람은 전생의 어디메인가 남아있던 기억을 뒤져냈고, 그렇게 자신이 잃어버렸던 나머지 조각을 찾아내버렸다.
"맛있어요?"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묻고 멋쩍게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운명적이라든가 진실되다든가 하는 수식어는 필요 없었다. 그냥 사랑이었다. 다른 어떤 사랑인들 이 사랑의 옆에 둔다면 다 빛을 잃을 것 같은, 진짜 사랑이었다. 이 깨달음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쨍하고 깨어냈다. 어떤 기운이 전신에 흘렀다. 그래 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해서는 아니 됐다. 각자는 이미 가슴을 아리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이제 각자의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둘이 서로에게 가지는 사랑에 비하면 기존의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과거에는 사랑이었던, 사랑인 줄 알았던 그것은 이제 애끊는 고통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고통이 각자가 사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서로는 말을 아꼈다.
그리워 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인연' 중에서>
사랑이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두 사람은 다시 또 알아버렸다. 아니기를 바랐지만 두 사람의 단면은 깨끗하게 맞아떨어졌다. 서로의 바라봄은 한없이 따뜻해서 시선을 마주해도 불편함이 없었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다르게 표현하는 신선함이 있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통했고 대가 없이 주고받았다.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서로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었다. 서로는 서로에게 선물이었다.
완벽한 선물. 대가 없는 선물. 그래서 더 부정하게 느껴졌다. 표면상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부정도 없었다. 그래서 더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이내 두 사람은 결심하게 되었다. 서로를 위해 떠나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빈 곳이 있었다면 곁에 둘 수 있었다. 빈 곳을 크게 자꾸 키워서 애써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몰래 사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었다. 함께하는 한 둘 사이에 어떠한 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잘 지내세요.", "네, 건강하시구요."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 다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식상하게 언제 또 보자든가,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전해달라든가, 흔하디 흔한 그런 말들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둘 다 목 안 어느 언저리까지 올라온 그 말을 힘들게 삼켜냈다. 나란히 걸어서 역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길고 너무도 짧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고운 인연에 작별을 고했다.
어떠한 운명이 오든지
내 가장 슬플 때 나는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은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피천득의 '인연' 중에서, 알프레드 테니슨의 '메모리엄'>
"맛있어?" 한추에 들러 떡볶이를 시켰다. 신이 난 아들내미가 입안 가득 떡볶이를 넣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대답도 없이 연신 삼켜대는 광경에 소리를 내서 웃었다. 잠시 후에는 갓 튀긴 고추튀김을 과감하게 베어 먹더니 입 안을 다 데고 잔뜩 삐져버렸다. 나를 보는 그 불만 가득한 얼굴이 못 말리게 사랑스러웠다. 치킨도 포장해서 저녁 때 엄마랑 같이 먹자고 달랬다. 단순한 녀석, 이내 화가 풀려서 눈웃음을 친다. 행복하다. 그래서 문득 그녀 생각이 났다. 테니슨의 메모리엄과는 다르게 그는 가장 행복할 때 그녀가 생각났다.
그는 인연을 만난 것이 원망스러웠다. 사랑을 하고 잃은 것이 슬펐다. 겨우 만난 세상을 떠나면서 더 좋은 세상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덕분에 소중한 사람들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의 사랑에 비추어 더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은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낫다. 차라리 몰랐으면 싶었고, 차라리 놓쳤으면 했었고, 수없이 많은 말을 삼켜 마침내 지나 보냈다. 그래서 비로소 더욱 고운 인연이었다.
입에다 기울이는 한 잔에 추억이,
또 한 잔에 먹먹함이,
또 한 잔에 당신이.
신사동 한추, 한잔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