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떡믈리에 Oct 14. 2022

떡볶이여,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와라

깊은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진미떡볶이

‘바다 가면 욕심내지 마라,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와라.
그러면 바다는 놀이터가 되지만

뭔가를 더 갖겠다고 하면

바다는 표정을 바꾼다.’ 

-다큐멘터리 <물숨(2016)> 중에서


요리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아니면 요리를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한 번쯤 하게 되는 실수 있다. 이 재료 저 재료를 계획 없이 그냥 넣어보는 것이다. 우연히 좋은 맛이 찾아질 수도 있겠으나, 많은 경우 기대를 벗어나거나, 원래 생각했던 맛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모르게 되고... 경험상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저런 맛이 나다가 정말 이도 저도 아닌 맛으로 귀결되곤 했다. 특히 해산물이 주는 깊은 맛에 반해서 이것저것 넣어보다가 이게 뭐지 하던 때가 왕왕 있었다. 해산물이 주는 풍미는 마치 바다에 잠수하는 것과 같아서 그 음식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을 누리려다가는 오히려 제 맛을 잃고 만다. 과욕을 부리면 요리가 표정을 바꾸는 것이다. 


성게알(생식소)의 사용이 주는 위험(?)이 그 대표 사례라 생각한다. 호불호는 있을 수 있지만 성게알은 엄연히 진미 중의 하나이고 고가의 식재료이다. 최근 부내 나는 인스타 사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서 그런 것인지, 아무 요리에나 성게알을 올리고 수 억에 파는데, '대체 왜 여기에?'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성게알의 강한 임팩트에 원래 요리의 맛은 온 데 간 데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제맛을 잃더라도 결과적으로 더 맛있으면 된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위의 사례처럼 우니를 올린 어떤 요리에서, 맛이며 향이며 관심이며 모두 우니에 쏠린다면, 원래의 목적이던 우니 아래의 그 어떤 요리는 무엇이 되는가? 


말이 나온 김에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떡볶이를 요리하다가 영양상의 이유로 닭가슴살을 넣었다. 닭의 비율이 어떤 선을 넘는 순간 이건 치킨떡볶이인지 매운닭볶음탕에 떡사리인지 모호해진다. 떡볶이에 넣는 어묵이 맛있어서 어묵의 양을 더 늘렸다. 그럼 이건 떡볶이인가 매운 어묵탕에 떡사리인가? 장자가 나비 되고 나비가 장자 되고 물아가 일체 되고 인생이 무상하다. 그렇다. 더 맛있고 덜 맛있고의 문제를 떠나서, 그 요리가 유지해야 할 기본적인 정체성이 흔들리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사실 요리는 요리가 가진 정체성의 경계를 허물며 발전한다. 조리 방법이나 재료의 일부가 변해서 기존의 요리를 대체하기도 하고, 별개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요리의 정체성을 논하고, 친척뻘의 요리들을 서로 구별하는 것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하면 참 어려운 문제이다. 


심지어, 이름만 남고 요리가 변해서 서로 매칭이 잘 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예컨대 떡볶이가 그러하다. 기름떡볶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볶는다는 느낌은 영 부족하지만 계속 떡볶이라고 부른다(떡탕이니 뭐니 다른 명칭을 제안하는 시도가 있지만 전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닭볶음탕(닭도리탕)도 마찬가지이다. 닭볶음탕에서 볶는 요리의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던가. 


경계를 허물며 발전하는 요리는 미묘한 차이로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데, 그래서 그 구별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예컨대, 김치찜과 김치찌개는 어떻게 구별하는가? 국물의 양 차이 말고 근본적인 차이를 논하기가 꽤 어렵다. 국물떡볶이와 클래식떡볶이(본인은 국물의 양이 떡을 3/4 이상 잠기게 하지 않는 떡볶이들을 편의상 클래식떡볶이로 분류한다)도 마찬가지. 국물이 넉넉한지 자작한지 국물의 양으로 구별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이름만이 나의 원수일뿐 

몬테규가 아니라도 당신은 그대로 나의 당신 

이름이 다 뭔가요

우리가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그 향기는 그대로인 것을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명확한 경계를 정함이 없이도 우리는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요리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그 맛은 그대로인 것을 이미 16세기에 셰익스피어 선생께서 확인시켜주셨지 않나? (아 이거는 좀 억지스럽나?)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어떻게든 요리를 구별하려 하고 정체성 자체를 즐기려 한다. '나 오늘 정말 정말 맛있는 떡.볶.이.가 먹고 싶어!' 이런 생각이 든 날에는 누가 보더라도 떡볶이라고 부를, 이름도 맛도 멋도 떡볶이인 그런 떡볶이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차이로 쉽게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하얀 쌀밥에 튀기 듯이 부쳐낸 써니사이드업 계란 프라이를 먹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은 날. 적당히 익은 맛김치를 곁들여서 육개장 사발면을 후루룩 빨아 넘기면 정말 행복할 것 같은 날. 그게 뭐라고 이를 이루면 엄청나게 행복해지고, 반대로 이루지 못하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이게 다 뭔가 싶다. 사소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소하게 생각되는 소망 하나 내 맘대로 안 될 때 우리는 너무나 절망스럽고, 사소하지만 소망하는 구체적인 요소들이 잘 성취될 때 우리는 고도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떡볶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 있다. 세상에 똑같은 떡볶이가 없고, 떡볶이에 대한 개인의 취향들도 아주 다양하고, 각자가 떠올리는 떡볶이의 양태도 구체적이다. 100% 내가 그리는 그 떡볶이를 항상 만날 수는 없다. 그러나 떡볶이를 먹고 싶은 날에는, 여러 가지 제약을 감안하여 타협에 타협에 타협을 하더라도, 우리가 떡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떡볶이를 먹어야 비로소 우리는 행복해진다. 떡볶이를 먹고 싶은 날, 닭볶음탕에 떡사리나, 매운 어묵탕의 떡사리로는 우리 안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다.


그런데 또 알다시피 우리가 사랑하는 떡볶이의 떡들은 섬세하고 여린 존재이다. 토핑에 욕심내지 않고 수용한도만큼만 응용하면 떡볶이로 즐길 수 있지만, 과욕을 부리다간 요리는 표정을 바꾸고 떡은 떡사리가 되고 우리는 다른 요리를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떡볶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다른 맛을 가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떡볶이가 아니라도 당신은 그대로 나의 당신, 이름이 다 뭔가요?'라고 읊조리며 애써 맘 다잡아보려 하지만 아쉬움은 감출 길 없다.


특히 해물 떡볶이는 말 그대로 해물을 쓰는 떡볶이이고, 바다가 지닌 강한 풍미에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비중에 따라서는 다른 요리가 되어버리기 쉽다. 떡 넣은 해물탕이나 떡 넣은 해물찜이 되더라도 그 역시 행복한 일이지만, 그래도 떡볶이를 만들었으면 떡볶이가 만들어져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떡볶이를 먹고 싶은 날에는 떡볶이를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떡볶이가 쉴 수 있는 딱 그의 숨만큼만 있다 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미 떡볶이는 훌륭하다. 바다의 맛을 풍부하게 담아내면서도, 길을 잃지 않고 떡볶이에 도달한다. 떡볶이가 가질 수 있는 해산물의 맛 그 끝을 보여주는 곳. 진미떡볶이. 



이전 04화 간축객서(諫逐客書)와 마복림(馬福林)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