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게 지친 사람의『채식주의자』

식탁에서 느낀 불필요한 섭취에 대한 사유

by 온수ONSU

처음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입에 아버지가 강제로 탕수육을 밀어 넣던 장면이었다.

그녀는 온몸으로 발버둥치며 저항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의 권위는 그녀의 턱을 벌리고 죽은 짐승의 살점을 쑤셔 넣는다.

그것은 식사가 아니라 명백한 폭력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운 영혜가 강제로 삽입된 튜브를 통해 음식물을 받아내던 장면도 오래 남았다.

그녀는 단지 ‘나무’가 되고 싶었다.

햇빛과 물만 있으면 충분한 존재, 누구도 해치지 않고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무해한 존재.

그녀에게 육식은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간 폭력의 결과였고,

결국 모든 음식은 거추장스러운 찌꺼기에 불과했다.


그때의 나는 그 모습을 비극으로만 받았들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영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 ‘소식좌’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먹는 것이 귀찮고,

씹는 행위 자체가 노동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의 취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감각은 그보다 영혜와 비슷하게 조금 더 근원적인 곳에 닿아 있다.


가족과 마주 앉은 식탁 위에서,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무언가를 입에 넣어야 할 때 나는 설명하기 힘든 기괴함을 느낀다. 아무리 정갈하고 귀한 음식이라 해도,

내 몸의 대사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것은 결국 ‘오물’이라는 이름의 찌꺼기가 된다.

내가 살기 위해 섭취한 것이, 타인이 치워야 할 배설물이 되어 나가는 이 필연적인 순환.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이 생리적 굴레가,

가끔은 참을 수 없이 징그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왜 먹어야 하지?


영혜가 되고 싶어 했던 나무는 배설하지 않는다.

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스스로를 지탱하고, 남겨진 것들은 다시 흙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살린다.

영혜의 거식은 단순한 음식 거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포식자’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규였다.

진정으로 무해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나 역시 식탁 위에서 이런 생각에 소외감을 느낄 때면 같은 생각을 한다.


나를 이루는 이 육체가 조금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다고.

먹고, 배설하고, 다시 먹어야 하는 이 무거운 생존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소식이 하나의 트렌드가 된 세상은 내게 잠시 숨 쉴 틈을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영혜처럼 ‘식물적인 평온함’을 동경한다. 인간이라는 조건을 벗어나지 못한 채말이다.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한계 안에서, 억지로 채우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먹는 행위의 폭력성에서 잠시 비켜서 있는 시간을 찾는다.



+화자는 음식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배가 고플 때는 잘 먹고, 다만 배고픔과 무관한 식사의 관성, 억지로 채워지는 순간을 불편해할 뿐이며, 건강상의 문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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