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분으로 건진 품격

운동의 묘미

by 제이로사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9시는 40~60대 아줌마들이 대세인 시간대다. 첫날, 나이 많은 언니들의 텃세나 패거리 문화에 휘둘리지 않을까, 내심 바짝 긴장했다. 눈치껏 샤워장까지 따라 들어갔다. 한 사람도 새치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먼저 들어가야 할 사연이 있어 보이면, 흔쾌히 양보도 해주었다. 처음 와서 어리바리한 나에게 선배 언니들은 샤워부스에서 샤워하는 방법부터 수영장 사용의 기본에티켓을 알려주고, 수영장까지 에스코트도 해주었다.

초급반 수영 코치는 누구도 소외감을 안 느끼도록 아주 공평하게 개인별로 영법을 강습해 주었다. 수영 연습 후 파우더룸에서였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짐이 먼저 놓인 자리에 내 짐을 내려놓자, 옆의 언니들이 엄한 눈길로 나를 제지했다. 나는 깜짝 놀라 얼른 짐을 뺐다.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수영장_4.jpg


그렇게 질서를 유지하고, 배려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외국인이 놀라는, 합리적인 한국인의 K-문화 경험하기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며 기분도 좋아졌다.



그런 줄만 알았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은 각 타임당 100명씩의 수영 회원을 모집해서 운영하고 있다. 수영 교대 타임의 샤워장은 당연히 늘 북새통이다. 10시 타임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과 9시 타임 수영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모두 겹치는 20분 정도는 거의 150명 이상이 샤워를 해야 하는 시간대이다. 여성 샤워장 샤워기는 60개가 조금 넘는다. 그러니 복잡할 수밖에.


수영을 다닌 지 두 주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수영을 마치고 샤워를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대기줄 두 번째에 서 있었다. 내 뒤로 서너 명 정도가 더 서 있었고, 다른 줄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80세를 훌쩍 넘겨 보이는 할머니가 샤워장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줄을 서지 않고, 통로에 수영 바구니를 내려놓더니 다짜고짜 머리 샴푸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의아했다. 할머니 순서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기다리시는 동안 비눗물에 눈이 매울 텐데. 힐끔거리며 할머니를 걱정하고 있던 그때, 거의 샤워를 마쳐가던 할머니 지인이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는 그 지인분이 내준 샤워기에서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지인분은 바로 샤워를 마치고 할머니에게 자연스레 그 자리를 양도하고 나갔다.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할머니의 다짜고짜 샴푸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내 눈에 목격되었다.


며칠 후 할머니는 그날도 머리에 샴푸 거품을 이고 있었다. 할머니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늘 규칙을 당연히 어기는 할머니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어졌다. 그때 내 옆의 샤워기에 빈자리가 났고, 나는 잽싸게 그 자리로 들어갔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나는 눈을 감고 바로 샴푸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드디어 부당한 할머니에게 정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내 행동은 정당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달랐다. 샤워하는 내내, 내 뒤통수 쪽으로 계속 바늘이 솟아올랐다. 불편하고 아팠다. 할머니를 포함한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비웃는 것 같아서였다. 할머니에게 너무했다는, 나의 소갈머리 없음에. 샤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슬쩍 할머니를 찾아보았다.


할머니는 이미 시원스레 떨어지는 샤워기 아래에서 꼼꼼히 온몸을 닦고 있었다. 누가 양보를 한 것인지, 줄을 서서 차례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얼굴에서 불쾌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개운함만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수영장 사람들은 거의 최고령인 할머니를 위해 그렇게 배려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K-할머니의 특권인 경로사상에 따라 자연스레 그쯤은 누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길어야 10분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10분 늦게 샤워한다고 크게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결국 문제는 눈치 없이 옹졸했던 나의 치기였다.



생각해 보니, 길어야 10분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10분 늦게 샤워한다고,
크게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눈치 없이 옹졸했던 나의 치기였다.


10분의 배려가 필요한 대목이 또 있었다. 어느 날 수영장에 갔는데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고급반 고인물 아주머니에게 문화센터 운영자가, 공식적으로 주의를 주었다는 소문이 물결 따라 퍼져나갔다. 고급반 레인에 있던 고인물 아주머니가 새로 승급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뒤에 서라, 너무 빨리 따라와 자신을 불편하게 하지 말아라, 하며 여러 번 텃세를 부린 것이다. 문제는 고인물 아주머니가 늦게 올라온 젊은 사람들보다 속도가 늦다는 점이었다. 고급반 레인은 수영 중 계속 막혔고, 고인물 아주머니 빼고 모든 사람의 불만이 쌓여갔다. 몇 차례 시끄러운 소리도 났다. 코치도 주의를 주었으나, 고인물 아주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 입장에서는 선배인 자신이 먼저 나가야 맞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체력의 한계가 고인물 아주머니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막상 따져보면 겨우 2~3분 늦게 출발하는 것이다.


대부분 수영장 레인에서는 젊고 잘하는 사람을 일부러 앞에 세운다. 레인의 원활한 흐름을 만들고, 민폐가 되지 않으려는 아줌마들의 배려다. 수영 연습 중 앞서 나간다는 것은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한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이 크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설익은 상태에서 앞서 나가 봤자 무리해서 다치거나, 자존심만 상한다는 것을 경험에서 알고 있다. 페이스메이커나 리더는 그만큼의 책임과 역할이 따른다는 것도. 양보하고 늦게 출발해도 겨우 3분 늦는 것이다. 우리는 선수가 아니다.


고만고만한 수준에서 몇 번째로 출발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와의 경쟁만 잘하면 된다.

인생과 똑 닮았다.


10분의 여유로 품위 있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으로 보인다면,

투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10분으로 수영장에서 건져 올리자.

나의 품격을.


10분으로 수영장에서 건져 올리자.
나의 품격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선입견 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