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지훈 Oct 17. 2023

축구X세계사 Take One

크루이프가 GOAT가 되지 못한 이유: 아르헨티나의 전두환

“나... 나오지 않는답니다!”

요한 크루이프 자서전: '마이 턴'

'

스페인 스포츠지 마르카의 바르셀로나 담당 발렌틴 마르틴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부장실로 뛰어들면서 내뱉은 한마디에 콜롬비아산 진한 에스프레소를 듬뿍 담은 코르다도로 아침을 열려던 데스크의 눈의 휘둥그래졌다.

    

“자네 지금 무슨말인가?”


“크... 크루이프가 월드컵에 나오지 않는다고요!”


발렌틴의 한마디에 편집국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지금은 1977년의 늦은 가을, 누구나 유럽이 낳은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가 내년의 월드컵에서 요샛말로 '라스트 댄스'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였다.


유럽축구의 GOAT


축구종주국 잉글랜드의 자존심부터, 월드컵이라는 유일한 메이저 국제대회의 발족까지 1960년대까지 세계 축구의 헤게모니는 단연코 유럽의 발 아래 있었다. 최초의 월드컵 백투백 챔피언을 이끈 이탈리아의 주세페 메아짜, 그의 호적수 마티아스 신델라, 종주국의 자존심 스탠리 매튜스, 특히 페렌츠 푸스카스와 레알 마드리드의 최전성기를 열어젖힌 아르헨티나 출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까지 스페인으로 귀화시킨 마당에 다른 대륙의 누군가를 언급할 이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GOAT(The Greatest Of All Time)라 불리는 역대 최고의 선수를 두고 벌이는 무림의 경쟁은 1958년 스웨덴월드컵에서 17살의 천재가 등장한 이래 불필요한 논쟁으로 전락했고, 그 천재가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3번째 우승을 조국 브라질에 안기며 줄 리메컵을 영구소장시키면서 이제 세계 축구의 최정상은 유럽이 아닌 브라질, 역대 최고의 선수 역시 유럽의 수많은 별이 아닌 단 하나의 초신성, 바로 펠레로 이론화돼 버렸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의 축구언론은 펠레에 대항할 유럽의 대체자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가 됐는데, 때마침 펠레의 국가대표 은퇴와 맞물려 적합한 인물이 운명처럼 떠오르면서 일시에 그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그가 바로 앞에서 언급된 요한 크루이프였다.


펠레가 3번째 줄 리메컵과 함께 세계 축구의 중심에서 퇴장한 뒤 정확히 1년 만인 1971년 리버풀의 거장 빌 샹클리로부터 “아약스라는 팀은 들어본 적조차 없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유럽축구에서 철저히 변방이자 무명이었던 네덜란드의 아약스를 이끌고 UEFA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을 3년 연속으로 우승시키면서 사상 처음으로 3번이나 발롱도르를 거머쥔 젊은 천재.


이제 모든 관심은 유럽 내에서 모든 영광을 달성한 이 거물이 펠레 은퇴 이후 처음 열리는 1974년 서독월드컵에서 다시금 유럽으로 세계축구의 헤게모니를 돌려놓고, 펠레와 역대 최고가 누구냐는 치열한 논쟁을 펼치게 될 것인가에 몰리게 됐다.


실제로 크루이프는 충격적인 퍼포먼스로 1974년 월드컵의 주인공이 됐다. 40년만에 월드컵에 출전한 네덜란드가, 비록 펠레는 은퇴했어도 자이르지뉴와 호베르투 히벨리누가 이끄는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압도하며 2-0으로 완파한 8강 A조 최종전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나 크루이프의 월드컵은 해피엔딩이 되지는 못했다. 그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인 베르티 포그츠의 활약 속에 두 발이 묶인 크루이프는 펠레의 영역에 다가가기 직전에서 새로운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의 대관식을 지켜보는 데 머물고 말았다. 따라서 4년이 지나 그의 마지막 월드컵이 될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은 다시 한 번 펠레의 경지에 다가갈 유럽축구인의 소망이 투영될 수 밖에 없는 최종장이었던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퇴장의 무대에 정작 주인공인 크루이프가 나서지 않는다니 유럽축구언론이 경악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크루이프는 왜 나오지 않는다는 건데?”


“정치적인 이유 아니겠습니까?”


“역시 또 그런 이유인 건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크루이프의 스페인행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약스를 3년 연속 유럽 최고의 팀으로 이끈 뒤 은사 리누스 미셸을 따라 바르셀로나로 적을 옮긴 크루이프는 프랑코 독재 체제의 후원을 받던 레알 마드리드를 제치고 14년만에 바르셀로나에 우승컵을 안기면서 카탈루냐의 영웅이 되었다. 특히 아들 르디 크루이프를 출산한 뒤 당시 스페인에서 쓸 수 없었던 카탈루냐의 성인 르디(Jordi)의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였고, 이는 들끓던 카탈루냐의 민족감정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크루이프니만큼 정치적인 이유로 아르헨티나월드컵에 불참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은 ‘남미의 나치’라는 악명으로 불린 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였기 때문이다.

     

페론주의의 몰락과 남미의 나치


우리에게 ‘에비타’로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국모 에바 페론의 헌신적인 내조에 힘입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안 페론은 현재 우리에게는 좌파 포퓰리즘의 대표격으로 유명한 페론주의를 내걸고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아르헨티나 제24대, 25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20세기 초 이래 몰락의 길을 걷던 아르헨티나의 재건에 단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러나 에비타의 요절 이후 군부 내에서 반페론파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1955년 9월 페드로 아람브루의 군사 쿠데타가 터지면서 오랜 망명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페론은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전전하면서도 끊임없이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페론주의자들에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들을 막후에서 지원하는 실세였고, 그와 척을 진 반페론주의의 군부 정권은 이에 계속된 군사 쿠데타로 맞대응하며 파업과 시위와 테러로 얼룩진 혼돈의 1960년대를 보내게 된다.


결국 10여 년이 넘는 정치적 혼란과 군사 독재에 신물을 느낀 아르헨티나의 유권자들은 그들의 근대사에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긴 페론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내비쳤고, 이에 페론은 1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6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로 다시금 당선되면서 ‘왕의 귀환’을 알렸다. 그러나 19세기 태생인 페론은 오랜 망명 생활로 이미 건강을 상당히 잃은 고령이었으며, 당선된 지 채 1년도 되지 못한 1974년 눈을 감으면서 한 시대의 이념이었던 페론주의도 그 주인을 잃은 채 방황하게 되었다.


이런 혼돈의 장에서 아르헨티나의 좌파 정권이 눈엣가시였던 CIA의 지원을 등에 업은 비델라는 페론 사후 2년만인 1976년, 미망인 이사벨 페론을 몰아내고 의회를 폐쇄했으며,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국회의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군부정권을 수립하는데 이른다. 그리고, 헌법을 정지시키고 쿠데타 이후 불과 5일 만에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초법적인 행각을 펼친다.


비델라는 페론주의와 극단적으로 척을 졌는데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언론검열로 대표되는 이른바 ‘더러운 전쟁’이 상징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델라의 지지도가 바닥을 치게 된 것은 가뜩이나 몰락하던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아예 지하 깊숙이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페론이 사망하던 1974년 5.8%를 기록하던 빈곤율은 1980년에는 무려 37.4%를 찍었다. 실업률 역시 비델라가 실정이라고 비난했던 이사벨 시절인 1975년 3.8%에 불과했던 것이 1982년 18%에 이르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외채 역시 1975년 78억달러 가량이었으나 1983년에는 6배에 달하는 450억달러에 이르렀다. GDP에서 빚이 14% 차지하던 국가가 무려 40%가 넘는 빚을 지게 된 라틴 아메리카에서조차 가장 붕괴된 경제체제를 지닌 국가였다.


비델라의 심복이었던 호세 마르티네즈 데 호즈가 지나치게 페론주의를 의식하며 급박하게 도입한 우파의 상징적 신자유주의는 비델라의 정치적 입지까지 크게 위협하는 실책이었다. 이에 바닥까지 추락한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비델라가 택한 방법은 바로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그것, 축구였다.


아르헨티나의 전두환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 아니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축구의 최강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브라질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다. 그러나 1978년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들의 성적표는 라이벌이란 단어가 우스울 수준이었다. 남미의 챔피언을 가리는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역대 최다 우승팀이라는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정작 세계 최고 권위의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유럽의 열강들을 모조리 누르고 3번의 챔피언이 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허문도를 내세운 이른바 ‘3S 정책’으로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 했듯이 비델라는 브라질에 억눌려있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열등감을 월드컵을 통해 풀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나중에 언급될 1934년 이탈리아월드컵과 더불어 가장 비열한 월드컵으로 기억되는 아르헨티나월드컵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치졸한 우승만들기 플랜은 일정부터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조별예선에서 아르헨티나가 치르는 3경기는 모두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리게 만들어 열렬한 홈관중의 분위기를 이어갔고 이동으로 얻는 피로를 최소화시켰다.


첫 경기인 헝가리전부터 심판의 노골적인 편파판정도 시작됐다. 선취골을 허용하자 아르헨티나의 거친 플레이와 이를 추동하는듯한 관중들의 드잡이가 펼쳐졌고 부상자가 속출하던 헝가리는 2명이나 억울하게 퇴장당하면서 결국 두 골을 얻어맞아 첫 제물이 되었다. 헝가리의 명장 버로티 러요시는 “아르헨티나는 12명이 축구를 한다. 12번째 선수는 심판”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다음 경기인 프랑스마저 2-1로 꺾고 일찌감치 8강행을 확정지은 아르헨티나지만 잔머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B조에서 디펜딩 챔피언 서독이 조 2위로 밀려 자칫 조 1위를 했다가는 2차 조별리그에서 서독과 한 조가 될 것을 우려한 아르헨티나는 조별예선 최종전에서 이탈리아에 정직한(?) 경기를 펼치면서 0-1로 패배, 조 2위로 2차 조별리그에 오르게 된다. 또 하나 눈엣가시인 팀은 바로 지난 대회 최고의 팀 네덜란드. 크루이프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우승후보였던 그들과도 만나지 않기 위해 네덜란드의 조별예선 최종전 스코틀랜드전에서도 편파판정이 불을 뿜는다. 어이없는 페널티킥을 헌납하며 네덜란드는 한 수 아래인 스코틀랜드에 2-3으로 패했고 결국 조 2위로 2차 조별리그에 나선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3팀인 서독, 네덜란드, 이탈리아가 모두 2차 조별리그 한 조에 묶인 것이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을 제외하면 껄끄러운 팀 하나 없는 대진을 받아들었다. 이제 3팀이 박터지게 싸워서 녹초가 된 1위팀과 여유있게 1위를 차지한 아르헨티나가 결승전에서 붙어 최초의 피파컵 트로피를 차지하는 그림만 완성하면 됐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우선 껄끄러운 유일한 상대인 브라질과의 대전을 편파판정 속에도 득점 없이 비기면서 비델라 아르헨티나의 계획은 꼬이기 시작했다. 페루전 한 경기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브라질의 골득실은 +5, 반면 아르헨티나의 골득실은 +2에 불과했다. 테오필로 쿠비야스가 이끄는, 조별예선도 네덜란드를 누르고 조 1위에 오른 페루를 4-0 이상으로 이겨야 결승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마리오 캠페스와 다니엘 파사렐라 이외 세계적인 선수도 없던 당시의 아르헨티나에 불가능한 미션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션 임파서블의 히어로 이단 헌트도 없는 아르헨티나에는 비델라가 있었다. 페루전 90분이 끝나고 전광판에 새겨진 숫자는 무려 ‘6-0’. 군사정권이 페루의 부채 5000만달러를 탕감해 줬다는 루머와 페루에 무상 곡물 지원을 약속했다는 풍문이 도는 가운데 아르헨티나는 이제 무려 48년만에 월드컵 결승전 무대에 어찌 됐든 서게 됐다.


GOAT가 되지 못한 크루이프, 그리고 진실은...


크루이프가 없는 네덜란드는 디펜딩챔피언 서독과 비기고 다음 월드컵의 챔피언이 되는 이탈리아를 잡으면서 죽음의 조를 뚫고 두 대회 연속 결승 무대에 선다. 그리고 크루이프도 아르헨티나로 날아간다. 14번 유니폼을 입고 피치 위에 서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의 자리는 영국 BBC의 스튜디오였다.


크루이프의 눈 앞에서 그의 동료들은 오심의 희생양이 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노골적인 파울에도 페널티킥은 불리지 않았고 헝가리 감독 러요시의 “공기마저 아르헨티나의 편”이라는 말처럼 버저비터로 들어갈 네덜란드의 마지막 슈팅마저 골 포스트를 때렸다. 하긴 그 골이 들어갔다 한들 경기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만큼 아르헨티나의 첫 우승을 위한 시나리오대로 착착 진행되어 갔다. 결국 연장전까지 가서 1-3으로 무릎 꿇고 두 대회 연속 준우승이란 결과를 받아든 네덜란드의 간판 요한 네스켄스는 “우리도 월드컵을 개최해야 한다”고 통한의 소감으로 이번 대회를 요약했다.


크루이프는 그의 자서전 ‘마이 턴(My Turn)’에서 분명히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내가 그 결승전에서 뛰었다면 네덜란드가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그랬을 것이다"


지난해 열린 카타르월드컵에서 우리 시대의 GOAT 리오넬 메시는 자신의 마지막 숙제와도 같았던 월드컵 우승을 마침내 달성하면서 오랜 GOAT 논쟁에 사실상의 해답을 제시했다. 이른바 펠레-마라도나-메시 중 누가 가장 위대한가 묻는 '펠마메' 논쟁. 이제 다수의 해외언론은 펠레나 디에고 마라도나 보다 메시의 손을 들고 있다. 그러나 만일, 크루이프가 그의 말대로 1978년 월드컵에서 우승했다면 '펠마메' 논쟁 이전에 '펠크마' 논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만약은 의미 없고 크루이프는 GOAT가 되지 못한 채 무관의 제왕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말 크루이프는 정치적인 이유로 아르헨티나월드컵에 불참했던 것일까. 30년 가까이 그렇게 알려져 그가 GOAT가 되길 바랐던 그의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진실은 2006년 이후에야 밝혀졌다.


1977년 9월 17일, 바르셀로나의 집에서 농구를 보고 있던 크루이프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우체부인 줄 알고 밖으로 나갔으나 그를 맞이한 이는 다름 아닌 권총을 든 괴한이었다. 괴한이 크루이프를 의자에 묶으려고 권총을 내려놓은 사이에 아내인 대니 코스터가 달아났고 그를 좇으러 괴한이 나가면서 한바탕 소동을 겪은 뒤 괴한은 체포됐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부유층을 상대로 이러한 납치범죄가 횡행했고 경찰이 비공개를 원하면서 이 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루이프는 8주 동안이나 가족들을 두고 지구 반대편에 가 있을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감독 에른스트 하펠의 간청도, 쇄도하는 네덜란드 축구팬들의 편지도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크루이프가 GOAT가 되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인 결정이 아닌 개인적인 사유였다. 그런데 이 사연이 알려지고 난 뒤에도 음모론은 끊이지 않았다. 그 납치미수범마저 아르헨티나 정부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다. 흠, 진실은 저 너머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