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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지훈 Oct 18. 2023

축구X세계사 Take Four

산시로스타디움의 이름이 주세페메아짜인 이유: 전두환의 대선배 무솔리니

“죽어라!”

1934년 월드컵 개막전을 관람하는 무솔리니


수많은 관중들이 다른 한마디도 섞지 않고 무시무시한 야유만을 퍼붓고 있다. 1934년 6월 10일, 이탈리아 로마의 스타디오나치오날레PNF. 관중석을 가득 메운 4만이 넘는 이탈리아 홈 팬들의 협박에 가까운 무서운 아우성은 놀랍게도 이탈리아와 결승전을 치르고 있는 상대 팀인 체코슬로바키아에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홈 팀 이탈리아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일그러진 얼굴로 피치를 내려다보는 독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1934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자국 이탈리아의 품에 안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했던 남자, 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비델라와 전두환의 대선배 무솔리니


앞서 다뤘던 ‘아르헨티나의 전두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에 반세기 앞서 조작된 월드컵의 선구자는 바로 무솔리니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런던 밀약을 통해 뒤늦게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 협상국의 일원으로 가세한 이탈리아는 정작 전후 베르사유조약에서는 약속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도시 피우메를 받지 못하고 고작 이스트리아반도와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지방을 귀속받는데 그쳤다. 이 불공정한 전후처리의 혼란을 틈 타 ‘전투 파쇼’를 창설하고 국가 파시스트당을 조직하며 이탈리아 정치계의 전면에 등장한 장본인이 바로 무솔리니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국가 파시스트당과 마치 이승만 정부의 ‘자유당 정치깡패’와 유사한 검은셔츠단을 이끌고 ‘로마 진군’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39세라는 이탈리아 역대 최연소의 젊은 나이에 정권을 획득한다. 당시 사회주의를 혐오하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지원을 받고 이렇다 할 유혈사태 없이 쿠데타에 성공한 무솔리니가 전후처리 문제로 불만이 폭증하던 이탈리아 국민들을 사로잡은 키워드는 바로‘로마제국’이었다.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나약한 이탈리아가 아니라 과거 전유럽을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부흥’을 내걸고 민족주의 색채를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파시즘 선전을 위해 손쉽게 꺼내든 카드가 바로 이탈리아인들이 광분하는 스포츠, 축구였다. 1898년 창설됐지만 지역별로 분산되어있던 세리에A를 단일 리그 방식으로 통합하며 지금과 같은 유럽 3대 리그의 메이저로 승격시키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 무솔리니 체제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국내에 머물지 않고 민족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밖으로 눈을 돌린 것이 때맞춰 1930년 창설된 월드컵이었다. 게다가 우루과이에서 열린 첫 대회는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오스트리아, 독일, 스페인 등 유럽의 강호들이 죄다 빠진 반쪽 대회였던 만큼 1934년 2회 대회는 무솔리니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스웨덴과 이탈리아가 2회 월드컵의 개최를 놓고 맞붙고 스웨덴이 우세한 듯 보였으나, 세계경제대공황의 여파로 스웨덴이 개최를 자진 포기하면서 이탈리아가 개최권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무솔리니의 별명인 ‘일 두체(도자라는 뜻)’를 따 두체컵이라고까지 불리는 역대 최악의 월드컵 이탈리아월드컵의 막이 오르게 됐다.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


무솔리니는 월드컵 우승으로 파시즘의 대대적인 선전을 꾀하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들었는데, 채찍은 살벌하게도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총살시켜 버리겠다”는 지금은 말도 안 되지만 당시로서는 얼마든지 현실적인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이에 발맞춰 이탈리아의 응원 구호 역시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였다.


한편 당근은 1930년 초대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준우승으로 이끈 유벤투스의 루이스 몬티와 라이문도 오르시, AS로마의 공격수 엔리케 구아이타 등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간판선수들을 대거 귀화시키면서 전력의 커다란 스텝 업을 가져온 것이다. 명장 비토리오 포초의 요구대로 행한 이러한 선수 강탈로 인하여 전 대회 준우승팀 아르헨티나는 한 판만에 탈락하고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물론 42년 후 호르헤 비델라의 아르헨티나는 이 때의 복수를 제대로 하게 된다.


조별예선 없이 16강 토너먼트로 개최된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의 첫 상대는 100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축구의 변방인 미국이었다. 심지어 미국은 멕시코와의 아메리카 지역예선을 월드컵 개막 불과 사흘을 앞두고 이탈리아 로마에 와서야 치렀다. 즉, 3일만 쉬고 이탈리아와 16강전을 벌이는 황당한 스케줄에 처한 것이다. 전력에서도 앞서고 체력에서도 앞선 이탈리아는 미국을 7-1로 대파하며 개막전을 완벽하게 장식했다. 개막전을 친히 로마의 스타디오나치오날레PNF를 찾아 관람한 무솔리니는 흡족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상대는 축구종주국 잉글랜드마저 제압했던 다크호스 스페인. 이탈리아는 경기 초반부터 맹공을 펼쳤지만 스페인의 수문장은 그 유명한 리카르도 사모라. 현재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최저 실점을 한 골키퍼에 수여되는 바로 그 '사모라상'의 주인공 되시겠다. 사모라는 당대 세리에A 최고의 골게터들, 즉 인터 밀란의 메아짜와 유벤투스의 조반니 페라리 그리고 로마의 구아이타의 결정적 슈팅들을 모조리 막아내면서 이탈리아 관중들에 좌절을 안겼다. 하지만 0-1로 지고 있던 전반 종료 직전 페라리가 명백한 골키퍼 차징으로 골문을 가른 것이 독재자의 마수에 눈이 먼 주심의 오심으로 골로 인정되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승부차기가 없던 당시의 규정에 따라 다음날 재경기로 열리게 된다.


재경기가 열렸지만 스페인에 사실상 승리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페라리의 차징으로 부상당한 사모라 골키퍼가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모라 대신 A매치 출전 경험이 단 1경기도 없는 백업 수문장 후안 호세 노게스가 장갑을 꼈다. 총살 위협을 받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거친 플레이에 전반 3분만에 스페인 공격수 크리산토 보스크가 부상으로 실려나갔고, 교체출전이 없던 당시 월드컵 규정에 따라 스페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10명으로 싸워야 했다. 심지어 중립국인 스위스 출신으로 공정한 판정이 기대됐던 주심 르네 메르세는 카드를 불사한 이탈리아의 폭력적인 플레이에도 침묵을 지키며 단 한 장의 경고도 주지 않았다. 결국 메아짜의 골로 이탈리아가 준결승에 올랐지만, 메르세는 고국인 스위스축구협회로부터 정직 징계를 받는다. 무솔리니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따랐다.


죽어라!


준결승 상대는 우승후보 1순위 오스트리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메아짜의 라이벌로 유럽축구 초창기 GOAT(The Greatest Of All Time)를 다투는 마티아스 신델라가 버티고 있었고, 월드컵이 열리기 불과 3개월 전의 A매치에서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경기였음에도 무려 신델라도 없이 4-2의 완승을 거둘 정도로 전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관중과 주심까지 합세한 이탈리아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전반 19분 아르헨티나에서 귀화한 오르시가 왼쪽 측면을 허물고 올린 크로스를 오스트리아 수문장 페터 플라처가 처리하려는 찰나, 메아짜와 볼로냐 레전드 안젤로 스키아비오가 말 그대로 갖다 박았다. 명백한 골키퍼 차징이었음에도 주심의 휘슬은 울리지 않았고, 역시나 아르헨티나 출신 구아이타가 빈 골문에 집어넣으면서 이탈리아가 승기를 잡았다.

신델라를 필두로 한 오스트리아는 반격을 벌였지만 동점골은 끝내 터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귀화 3인방 중 핵심인 센터 하프 몬티가 인생 경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물론 8할은 몬티가 신델라를 제대로 막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2할은 몬티의 거친 파울들을 심판이 모조리 눈 감아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경기였다면 몬티는 이미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했을 지도 모를 수준이었다.


이제 ‘최강의 적’ 오스트리아마저 제압한 ‘아주리 군단’에 남은 것은 우승컵 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승에서 맞닥뜨린 체코슬로바키아는 수문장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가 사모라가 빙의한 듯 미친 선방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후반 26분 체코슬로바키아 공격수 안토니오 푸치에 선제골을 얻어맞자 관중석은 난리가 났다. 남은 시간은 불과 20분 남짓, 관중석의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라는 구호는 “죽어라!”라는 괴성으로 바뀌었고 상대팀을 향한 위협은 이탈리아를 향한 분노로 치환되고 있었다.


총살이든, 폭동이든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이탈리아를 구한 것은 또다시 오르시였는데, 경기 종료 10분을 남기고 구아이타의 패스를 받아 수비를 등진 채 아름다운 호를 그리는 왼발 터닝슛을 터트렸다. 제 아무리 플라니치카라도 막을 수 없는 급격한 각도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오른쪽 골문을 가르면서 경기는 연장으로 향한다.


연장에서 빛을 발한 것은 역시나 ‘에이스’ 메아짜로 연장 전반 5분만에 페널티에어리어 안에서 상대 수비를 끌어당긴 뒤 구아이타에 완벽한 패스를 찔러줬고, 구아이타의 연결을 받은 스키아비오가 침착하게 골문을 가르면서 마침내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온 국민이 바라던 월드컵 우승 트로피에 이탈리아의 이름이 새겨지는 순간을 맞았다. 1934년 월드컵은 전세계로 라디오 중계된 최초의 월드컵으로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우승 순간은 파시즘 선전을 곁들여 전세계 15개 채널의 전파를 탔다.


영원히 남은 메아짜와 영원히 몰락한 무솔리니


하지만 첫 번째 월드컵 우승의 영광을 합작한 메아짜와 무솔리니의 운명은 이후 크게 엇갈린다. 1934년 월드컵에서 자국에 우승을 안긴 메아짜는 4년이 지난 1938년 프랑스월드컵에는 주장 완장을 차고 대회에 나선다. 그리고 이탈리아 역시 1934년 월드컵 우승, 1936년 베를린올림픽 우승을 차지한, 무솔리니의 협작이 아니더라도 명실상부한 세계최강국의 명성을 쌓고 있었다.


1라운드에서 베를린올림픽 준결승전에서 만나 연장 접전 끝에 동메달의 아픔을 안긴 노르웨이와 맞서 또다시 연장까지 가는 혈투를 벌이며 2-1의 신승을 거둔 이탈리아는 8강전에서 개최국 프랑스와 맞닥뜨린다.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4년 전의 편파 판정과 관중들의 폭력적 반응, 정치 세력의 음모 등으로 점철된 더러운 스포츠가 아닌 페어플레이와 신사적인 경기 운영으로 호평받으며 월드컵의 창시자  리메가 노벨평화상 후보까지 오르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준결승은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만난 남미팀 브라질이었다. 당시만 해도 브라질은 지금 같은 세계최강의 이미지가 아닌 세계 경제대공황으로 개최국에서 선수들이 직접 커피를 팔아 경비를 마련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뛰는 미지의 팀에 머물렀다. 하지만 1938년 월드컵의 브라질에는 펠레의 우상으로 불리는 레오니다스 다 바가 있었고, 레오니다스는 그 명성에 걸맞게 8강전까지 3경기에서 5골을 터트리는 괴력을 발휘 중이었다.


하지만 레오니다스는 재경기까지 치른 이른바, ‘보르도의 전투’라고 불린 체코슬로바키아와의 8강전에서 상대 수비수와 충돌하여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등 부상을 당했고 브라질 감독 아데마르 피멘타가 그를 준결승에서 제외하는 대진운까지 이탈리아에 따랐다. 레오니다스가 빠진 브라질의 무딘 창은 ‘마법의 고양이’로 불린 이탈리아 명 수문장 알도 올리비에리를 뚫을 수 없었고 메아짜는 ‘파넨카킥의 원조’와 같은 페널티킥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메아짜의 A매치 마지막 득점이기도 한 이 페널티킥은 비화가 있는데 파넨카킥은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닌, 킥을 하려는 순간 바지 고무줄이 끊어져 엉거주춤한 자세로 슛을 하는 바람에 연출된 것이었다. 메아짜는 골 세리머니를 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바지를 움켜잡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두 대회 연속으로 월드컵 결승에 오른 이탈리아는 페렌체 푸스카스 이전 헝가리 최고의 스타였던 샤로시 죄르지가 있는 ‘매직 마자르’와 결승에서 맞붙고, 이전 월드컵의 오욕을 지워내는 뛰어난 경기력으로 마침내 당당한 우승컵을 획득한다. 이탈리아 명장 포초는 아직까지도 유일한 월드컵 2회 연속 우승 감독으로 남았다. 지난해 카타르월드컵에서 이 기록에 도전했던 프랑스의 디디에 데샹은 아쉽게도 결승전 승부차기로 분루를 삼켜야 했다.


메아짜는 월드컵 2연패를 비롯해 세리에A 우승 3회, 세리에A 득점왕 3회, UEFA 챔피언스리그의 원조격인 미트로파컵 득점왕 3회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라이벌 신델라를 앞서 현대축구 초기 최초의 지배자로 역사에 남게 됐다. 1979년, 만 68세의 나이로 그가 숨을 거두자 전성기의 대부분을 보낸 인터 밀란은 AC 밀란과 함께 쓰는 홈 구장 산시로스타디움의 이름을 주세페메아짜로 바꾸면서 그에게 영원불멸의 역사를 선사한다.     

반면, 20년 넘게 장기집권하며 어쩌면 종신 독재도 가능했을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이라는 침략전쟁으로 선회하면서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한다. 무솔리니의 장엄한 선전포고가 공허한 외침이라는 것은 남프랑스침공, 이집트전역, 그리스침공, 북아프리카전역으로 이어지는 연전연패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결국 지지부진한 전과로 민심을 완전히 잃은 무솔리니는 1943년 7월 24일 탄핵당했고 그의 팬인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괴뢰정부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명목상 국가 원수가 됐지만, 독일 군복으로 변장해 도망치다 이탈리아 레시스텐자 파르티지아노에 체포되어 거꾸로 매달린 채 기관총에 벌집이 되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오욕의 역사를 함께 했지만 다시 찾아온 기회에서 실력으로 증명한 메아짜는 영원히 기억될 이름으로 영면한 반면, 외교상 고립의 탈출을 꾀하려다 독일과 손을 잡고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 되는 침략적 욕망의 오판을 저지른 무솔리니는 죽음 이후에도 치욕을 당했다.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두 이름은 이렇게 상반된 기억 속에서 각각 밀라노와 로마에 잠들어있다. 아, 무솔리니는 편안히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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