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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지훈 Oct 19. 2023

축구X세계사 Take Six

매직 마자르와 베른의 기적: 헝가리혁명으로 붕괴된 무적의 팀

“페렌츠다! 그가 돌아왔다”


“푸스카스! 마자르여 영원하라”


1954년 7월 4일 오후 5시 엄청난 비가 피치를 잔뜩 적시던 스위스 베른의 방크도르프슈타디온. 1954년 스위스월드컵 결승전에 나서는 헝가리 선수단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제일 먼저 입장하는 등번호 10번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작금 세계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이자 세계 최강의 팀 헝가리를 이끄는 캡틴 페렌츠 푸스카스. 부상으로 8강전과 준결승에 나서지 못했던 그가 결승에 돌아오자 헝가리 관중과 독일 관중의 희비는 크게 엇갈렸다. 하지만 잔디에 쏟아지던 빗방울이 그의 눈물로 변하기 까지는 채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공포의 이름 매직 마자르


1930년대 마티아스 신델라가 이끌던 ‘분더 팀’ 오스트리아가 유럽을 점령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공백을 딛고 재개된 1950년대 유럽 축구의 지배자는 ‘매직 마자르’로 불린 헝가리 축구국가대표팀이었다. 반쪽 대회이자 정치적 음모로 아직 권위를 채 인정받지 못하던 월드컵에 비해 당시 세계 축구 최고의 무대는 올림픽이었는데, 1952년 헬싱키올림픽 축구 금메달의 주인공이 바로 이 공포의 마자르족이었다.


이듬해에는 축구종주국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1950년 브라질월드컵 이전까지 월드컵 무대에도 나서지 않던 잉글랜드의 성지 웸블리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를 6-3으로 완파해 영국 축구팬들을 경악시켰는데, 페렌츠 푸스카스는 잉글랜드의 간판 수비수이자 주장이었던 울버햄튼 원더러스의 전설 빌리 라이트를 소위 갖고 놀아 주세페 메아짜 이후 자신이 유럽 최고의 슈퍼스타임을 확고히 했다.


당시 헝가리는 1950년 6월 4일부터 1956년 2월 19일까지 6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50번의 A매치를 치르면서 단 한 번만 패배한 말도 안 되는 승률을 자랑하는 팀이었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럽축구 역사상 최강의 국가대표팀을 꼽을 때 1954년의 헝가리는 1974년 독일월드컵의 네덜란드, 2010년 남아공월드컵의 스페인, 1938년 프랑스월드컵의 이탈리아 등을 모조리 제치고 맨 앞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1954년 월드컵은 매직 마자르가 세계인들에 그 위용을 자랑하는 쇼케이스가 될 것임을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명성대로 헝가리는 월드컵 조별예선 첫 경기부터 경이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아시아에서 온 월드컵 처녀출전국을 9-0으로 처참히 무너뜨렸는데, 9-0이 오히려 잘 싸운 것이라고 응원을 받은 그 나라는 한국전쟁의 포화가 가신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다음 상대는 그나마 유럽에서 헝가리를 견제해 볼 만 하다는 서독이었다. 하지만 매직 마자르는 주포 산도르 코츠시스가 4골을 터트리는 원맨쇼를 펼치며 서독마저 8-3으로 대파했다. 차원이 다른 헝가리의 경기력에 세계 언론은 연일 극찬하기 바빴으나 이 날의 승리는 헝가리에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제공하고 말았다.


베른의 기적? 추악한 진실


첫째는 이 대회만의 요상한 토너먼트 룰이었다. 스위스월드컵의 8강 편성은 1조 1위와 2조 1위, 3조 1위와 4조 1위가 맞붙어 이들 승자가 준결승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반대편 시드에서는 1조 2위와 2조 2위, 3조 2위와 4조 2위가 대결해 마찬가지로 준결승에 오르는 것이다. 즉, 조 2위를 한 팀은 다른 조의 1위와 결승까지 한 번도 경기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수월한 국가들과 대결하며 정작 조 1위를 해 어드밴티지를 받아야 하는 팀들끼리는 치열하게 맞붙어 아무런 이점없이 조별예선에서 자신들보다 낮은 성적을 받은 팀들 중 승자와 결승에서 만나는 셈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약체인 개최국 스위스가 조 2위로 올라가 어떻게든 수월한 대진을 만나 결승까지 진출할 꼼수를 세운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다. 예상대로 잉글랜드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오른 스위스는 오스트리아에 5-7로 역전패하면서 그러한 꼼수마저 통하지 않았다. 이를 간파한 독일의 수장 제프 헤어베어거는 굳이 헝가리를 이겨 조 1위를 해 봤자 전혀 혜택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헝가리와의 조별예선에서 주축 선수들을 대거 제외했고 3-8의 참패를 맛 봤다. 결국 이 패배는 전략적인 결과물이었지, 결코 그 정도의 실력차는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약점은 푸스카스의 부상이었다. 전력을 다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독일전에서 푸스카스가 의미없는 부상을 당하면서 헝가리는 가뜩이나 조 1위들만 몰린 8강과 준결승전을 푸스카스없이 싸워야 하는 최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약점은 전대회 준우승팀인 브라질과의 8강전부터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베른의 전투’라고 불린 헝가리와 브라질의 8강전은 당대 유럽과 남미를 대표하는 최강팀들의 맞대결이었으나 다른 의미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월드컵 역사상 가장 지저분한 난투극이 벌어진 경기로 말이다. 이날 양 팀은 44회의 파울을 주고받았고 4명이 경고를 받았으며, 무려 3명이 퇴장을 당했다. 심지어 경기가 끝나고도 브라질 선수들은 헝가리 라커룸에 난입해 축구가 아닌 UFC를 벌였고, 헝가리 감독 셰베시 구스타브까지 얻어맞아 이마를 꿰매야 했다. 외신은 이날의 촌극을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 비꼬았다.


어쨌든 아직까지도 역대 최고의 풀백 자리를 두고 파올로 말디니, 카푸, 카를로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등과 자웅을 겨루는 자우산투스, 니우통 산투스가 건재한 브라질을 상대로 푸스카스 없이 4골이나 터트리며 준결승에 오른 헝가리였지만 다음 상대는 산너머 산,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였다. 푸스카스가 없어도 ‘폴스 나인’의 개척자인 난도르 히데구티와 연장에서만 2골을 터트린 코츠시스의 맹활약으로 헝가리는 남미의 양대산맥을 모조리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결승에 오른다.


하지만 여파는 상당했다. 브라질과의 전투로 거의 모든 선수가 잔 부상을 갖고 있는데다, 우루과이전도 연장을 치르고 단 이틀만 쉬고 결승전을 치러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반면 서독은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2-0, 준결승에서 오스트리아를 6-1로 대파하고 체력을 비축한 상태에서 여유있게 결승에 선착해있었다. 게다가 결승전 날씨도 문제였다. 비가 엄청나게 온 잔디에서 서독 선수들은 아디다스가 개발한 최첨단의 우천용 축구화로 갈아신고 나왔다. 반면 낙후된 당시의 인프라에서 구스타브의 포지션 체인징에 따라 ‘소셜리스트 풋볼’을 기반으로 유기적인 움직임이 핵심이었던 헝가리에 있어 미끄러지는 바닥은 최악의 조건이었다.


이 모든 악재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팬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두 경기나 쉬고 돌아온 푸스카스의 귀환이었다. 푸스카스는 완전치 못한 컨디션임에도 전반 6분만에 선제골을 터트려 경기장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2분만에 추가골이 터지면서 헝가리의 우승이 기정사실화되는가 했으나 독일의 전략가 헤르베르거는 8강과 준결승을 지배한 코츠시스와 히데구티의 예봉을 제압하는 전략을 들고나와 추가실점을 막았고 무뎌진 헝가리의 수비진을 헬무트 란이 헤집으면서 전반을 2-2 동점으로 마무리하는데 성공한다.


다급해진 헝가리의 후반 공세도 서독 수문장 토니 투레크가 필사적으로 막아냈고,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진 헝가리의 중원에서 란이 기습적인 중거리슛으로 결승골을 터트리면서 매직 마자르의 전설도 무너지고 만다. 이렇게 ‘베른의 기적’이 완성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 멸시받던 서독에 있어 운명적인 전환점이 된 날이었다.


하지만 ‘베른의 기적’은 결국 아름다운 패자와 추악한 승자로 남게 되었다. 전반을 마치고 헤르베르거가 선수들에게 메스암페타민을 먹였다는 사실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메스암페타민은 2차 세계대전 때 병사들에게도 지급되던 약물로 우리에게도 ‘히로뽕’으로 잘 알려진 마약이다. 결국 기적은 각성제가 만들어낸 거짓된 신화였다. 물론 암페타민 계열은 1968년에야 금지약물로 지정되었기에 합법적인 우승이지만 나치에 가담했던 전범국의 감독이 전쟁 때 쓰던 약물로 만들어낸 우승에 과연 ‘기적’이란 고귀한 단어가 가당키나 한 지 의문일 따름이다.


마자르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그러나 푸스카스는 다음 무대인 1958년 스웨덴월드컵에도 아직 31세였다. 히데구티는 없겠지만 코츠시스도 29세, 요세프 보직도 33세이니만큼 매직 마자르의 황금세대의 ‘라스트 댄스’를 기대해 볼만도 했다. 실제로 헝가리는 1956년 초반까지도 ‘베른의 기적’을 제외하면 무패의 팀이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까닭이 매직 마자르를 붕괴시키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소련에 의해 공산화된 헝가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지를 등에 업은 독재자 마차시 라코시의 폭압적인 분위기 하에서 극도의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죽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뒤를 이으면서 힘을 잃은 라코시는 개혁주의자 임레 너지에 수상직을 넘겨주게 된다. 너지는 빠르게 헝가리의 경제를 회복시키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던 라코시는 1955년 4월 너지를 해임하면서 다시 정권을 탈취한다.


이에 민심은 격분했고 1956년 10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스탈린 동상 철거로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기관총을 동반한 유혈진압이 전개되고 첫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혁명이 펼쳐졌다. 10월 24일 소련군이 진입하면서 시민군과의 총격적인 벌어졌고 헝가리군 일부가 시민군을 지원하면서 이튿날 국회의사당이 시민군에 점거된다. 라코시 일당은 소련으로 도주했고 너지가 수상으로 돌아오면서 무력 봉기는 잦아드는가 했다.


너지는 새정부의 개혁정책을 발표하면서 민심을 진정시키고 소련군의 무력 진압 중지를 요청했으나, 소련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너지는 헝가리의 중립을 선포하고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와 소련군의 철군을 요구하는 강경한 자세로 돌아선다. 이에 격분한 흐루쇼프가 대규모 소련군을 헝가리에 투입하면서 헝가리군은 무장해제당했다.


부다페스트 중심의 시민군은 헝가리판 화염병인 ‘몰로토프 칵테일’ 등으로 저항해 봤으나 대규모 소련군의 군사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3000여명의 사망, 실종자가 나왔고 이중 민간인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다. 너지 역시 유고슬라비아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소련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실패와 무자비한 진압으로 무려 20만명이 헝가리를 떠났는데 푸스카스도 마찬가지였다. 푸스카스의 소속팀이었던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헝가리 혁명 당시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유러피언컵 원정경기를 치른 직후였다. 이들은 소련군의 무력 진압 소식을 듣고 부다페스트로 돌아가지 않고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스타디움에서 홈경기를 대신한다.


푸스카스와 코츠시스, 치보르 졸탄 등 이 때 헝가리를 떠난 선수들은 UEFA로부터 2년간 출전 정지의 징계를 받으면서 결국 1958년 월드컵을 통해 세계 최고의 자리를 굳히려 했던 매직 마자르의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2년의 공백이 있고 당시로서는 은퇴할 나이인 31세의 노장이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AC 밀란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명문들이 푸스카스를 원했다.


결국 푸스카스가 택한 팀은 당시 푸스카스에 비견되던 유럽축구 최고의 슈퍼스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주역인 레알 마드리드였다. 31세의 늦은 나이에 프리메라리가에 데뷔하고도 푸스카스의 천재성은 여실히 증명되는데, 4번의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프리메라리가 5연패의 위업을 달성했고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에서도 2번의 득점왕을 차지하며 트로피도 3번이나 들게 된다. 전성기 시절 레알에 입단했다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리오넬 메시도 깨지 못할 어마어마한 역사를 쌓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31세에도 못 이룬 꿈을 축구선수로서 환갑, 아니 칠순은 넘은 35세에 이루기 위해 1962년 칠레월드컵에 이번에는 스페인 국기를 가슴에 달고 나선 푸스카스였지만 하필 영혼의 파트너인 디 스테파노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삐걱대기 시작했고, 8강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조별예선 최종전 상대는 하필이면 디펜딩 챔피언이자 이제 그의 자리를 차지한 젊은 천재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이었다.


비록 펠레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가린샤와 바바 그리고 마리우 자갈루는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푸스카스는 스페인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마지막 꿈을 향해 질주했으나 레알 동료 프란시스코 헨토의 오버헤드킥이 골문을 갈랐음에도 노골로 선언되고, 엔리케 코야르가 얻어낸 페널티킥이 프리킥으로 둔갑하는 등 유럽이 아닌 남미에서 열린 월드컵의 텃세를 받으며 그렇게 매직 마자르의 에이스의 마지막 무대는 쓸쓸히 막을 내린다.


1981년에서야 푸스카스는 헝가리로 돌아왔고, 1989년이 되어서야 헝가리의 민주화가 이뤄진다. 그 사이 매직 마자르는 잊혀졌고 헝가리 국가대표팀은 다시는 그와 같은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푸스카스가 떠난 1958년 월드컵에서는 조별예선 탈락에 그쳤고, 역시 조별예선에서 탈락한 1986년 멕시코월드컵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유로에서도 유로72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본선 무대에 오르지 못하다가 유로2016에서야 바뀐 룰 덕에 16강에 오르면서 체면치레한 수준이다.


1938년 월드컵 결승에서 맞붙었던 이탈리아, 1954년 이변의 주인공 서독, 그 대회 8강전에서 전투를 벌였던 브라질. 모두 축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강국이지만 이제는 누구도 헝가리를 축구 강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푸스카스의 이름도 이제는 FIFA가 매년 전 세계에서 가장 멋진 골에 수여하는 ‘푸스카스 상’ 정도로만 회자되고 있다. 2020년 손흥민이 받은 바로 그 상이다. 1956년 헝가리혁명이 성공했다면 매직 마자르의 이름값도, 푸스카스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겠지만 역사는 그렇게 흐른다.

1954년 월드컵을 다룬 영화: '베른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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