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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지훈 Oct 20. 2023

축구X세계사 Take Seven

프랑스 영웅이 된 알제리판 친일파의 아들: 톨레랑스의 다국적 레 블뢰

“프랑스는 우월한 백인의 나라다. 열등한 흑인과 아랍계가 대표해서는 안 된다”

알제리전쟁을 다룬 영화: '알제리 전투'


아돌프 히틀러가 살아 돌아온 듯한 이 발언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프랑스의 인종차별주의자인 장 루이 마리 르펜이 주장한 망언이다. 미셸 플라티니나 장 피에르 파팽 등 과거의 백인 슈퍼스타들로만 프랑스 축구국가대표팀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프랑스월드컵에 나서는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면면은 생경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메 자케 프랑스 감독은 “당신이 좋아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로만 국가대표팀을 구성하라”고 보기좋게 응수한 뒤 이 다국적 군단을 이끌고 마침내 프랑스에 사상 첫 FIFA컵을 안긴다.


프랑스의 영웅이 된 알제리판 친일파의 아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의 프랑스 대표팀은 사실상 다국적 올스타나 다름없는 면모였다. 가나 출신 마르셀 드사이, 세네갈 출신 파트리크 비에라, 과들루프 이민자 릴리앙 튀랑과 티에리 앙리 그리고 베르나르 디오메드, 카리브해를 떠나 온 베르나르 라마, 아르메니아에서 온 유리 조르카에프와 알랭 보고시안, 바스크 출신 빅상트 리자라쥐, 태평양을 건너 온 크리스티앙 카랑뵈, 아르헨티나 이중국적자 다비드 트레제게와 포르투갈 이민자의 후예인 로베르 피레까지.


이 중 단연코 핵심은 알제리 이민자의 후손인 지네딘 지단이었다. 플라티니가 1986년 멕시코월드컵의 디에고 마라도나를 방불시키는 원맨쇼로 유로84를 우승시킨 뒤 에릭 칸토나, 피에르 파팽, 다비드 지놀라의 황금세대가 최초의 월드컵 우승을 안길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클럽에서는 단연 레전드였던 이들은 레 블뢰(Les Blues) 유니폼만 입으면 모래알 조직력으로 일관하면서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과 1994년 미국월드컵, 연속 본선진출 실패라는 역대 최악의 결과물을 내놓고 말았다. 이에 자케 감독은 유로96부터 24살의 젊은, 하지만 플라티니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지단에 전권을 부여하고 2년 후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모든 것을 쏟아붓게 된다.


실상 1998년 월드컵의 주인공은 플라티니의 후계자 지단이 아닌, 펠레의 현신인 브라질의 호나우두였다. 약관의 나이에 바르셀로나와 인터 밀란 유니폼을 입고 발롱도르를 휩쓴 호나우두에 비해 개최국의 에이스라는 점만 빼면 지단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드물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단은 사우디아라비와의 조별예선 2차전에서 쓸데없는 폭력행위로 2경기 출장정지의 징계에 처했고, 지단이 없는 프랑스는 파라과이와의 16강전에서 연장까지 끌려간 끝에 로랑 블랑의 월드컵 역사상 첫 골든골로 겨우 승리했다. 만일 16강전에서 프랑스가 패하기라도 했다면 지단의 운명은 심하게 뒤틀렸을 것이다.


이탈리아와의 8강전도 승부차기로 겨우 이겼고, 준결승에서 만난 신생팀 크로아티아도 0-1로 끌려가다 튀랑의 인생경기로 힘들게 뒤집은 프랑스가 호나우두-베베토-히바우두가 이끄는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꺾을 것으로 본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월드컵 내내 이름값을 전혀 못해 우승에 실패할 경우 모든 비난을 한 몸에 받을 것으로 보였던 지단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카나리아 군단의 핵심인 둥가를 피지컬에서 압도하면서 두 개의 헤딩골로 세계를 경악시켰고, 축구황제 대관식을 기다리고 있던 호나우두는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0-3의 참패를 겪는다.


자국에서 이변의 첫 우승을 이루고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열창하는 유색인종의 대표팀이 갖는 상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프랑스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톨레랑스’의 현장을 전세계에 과시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 핵심에 자리한 알제리계 지단의 존재는 톨레랑스라는 미명 하에 실상은 인종차별의 늪에 살았던 소수 이민자들의 희망이 되었다. 하지만 알제리 극우단체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지단의 영웅화를 비난했는데, 바로 그의 아버지가 ‘알제리판 친일파’인 ‘아르키(Harki)’에 가담했다는 까닭이었다.


알제리전쟁과 톨레랑스, 프랑스의 두 얼굴


무려 100년이 넘게 알제리는 프랑스에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각국의 독립 분위기가 들끓었고 프랑스 망명정부가 나치 독일에 승리하여 마침내 수도 파리를 탈환한 ‘승리의 날’인 1945년 5월 8일,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졌다. 특히 5000명에 이르는 무슬림들이 세티프에서 전승을 기리며 독립을 요구하자 프랑스군은 무차별 무력진압으로 대응했다. 알제리 집계에서 무려 45000명이 학살당한 세티프 구엘마 학살은 알제리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알제리 국기를 든 채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한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는 알제리 독립의 상징으로 등극했다.


2차 세계대전과 인도차이나 전쟁에 프랑스군으로 입대해 승전하고 돌아온 상당수 알제리군은 되려 자신들에 총구를 돌린 프랑스에 격분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에 가담했다. 이 숫자는 10만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시민군에 가까웠던 민족해방전선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을 직접 치른 정규군이 가세하자 프랑스도 더 이상 무력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자치권 확대라는 당근을 제시한다. 하지만 알제리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한 유럽계 백인이 나머지 87%의 현지인과 동등한 의석을 배정받고, 선거구 조작과 부정선거가 판치가 1954년 마침내 알제리전쟁의 막이 오른다.


민족해방전선은 1954년 11월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마찬가지로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을 쟁취한 호찌민의 베트남 독립동맹군을 본따 게릴라전에 나선다. 이에 프랑스도 무력으로 보복했는데, 민족해방전선이 1955년 필립빌 학살로 100여명의 프랑스 민간인을 살해하자, 프랑스군은 그 보복으로 열 배에 달하는 알제리인 1000여명을 죽이는 식이다. 1957년에도 프랑스는 민족해방전선 내부조직을 파훼한다는 명목 하에 3000명 이상을 처형했고, 프랑스의 잔인한 대응방식에 국내외는 물론 군 내부에서도 가열찬 논란이 전개됐다. 특히 좌파 성향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민족해방전선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면서 내분 형국을 띤다.


결국 프랑스 제4공화국이 무너지고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샤를르 드골이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으로 전면에 나선다. 드골은 자신을 지지한 알제리 세력을 믿고 “알제리의 운명은 알제리인이 결정한다”는 파격적인 민족자결원칙을 발표한다. 1961년 드골 정부는 알제리의 민족자결원칙과 독립을 주창한 신정부 구상안을 국민 투표에 붙여 75%의 지지를 얻으면서 사실상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반대한 일부 극우파 군부가 4월 21일 쿠데타를 일으켜 알제리 주요 거점을 장악하자 드골은 육군 정복 차림으로 방송에 나와 반란에 참여하지 말 것을 군부에 호소했다. 다행히 반란은 퍼지지 않았고 쿠데타에 실패한 반란군 소수는 드골의 암살을 시도하고 테러를 자행하며 최후의 발악을 해 보았지만 민족해방전선과 프랑스군의 합작에 곧바로 진압된다. 프랑스와 민족해방전선은 이듬해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는 에비앙협정을 체결하면서 132년의 길고 길었던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는 끝이 난다.


지단의 아버지가 가담한 것으로 의심받은 아르키는 알제리계 아랍인 보조병으로 프랑스 편에서 싸운 알제리 입장에서는 ‘친일파’와 다름없었다. 1962년 독립 당시 아르키의 숫자는 무려 26만명에 달했는데 드골 정부와 민족해방전선의 평화협정 당시 아르키를 처벌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독립 후 프랑스의 영웅인 잔 다르크 동상을 끌어내 참수할 정도로 프랑스를 증오하고 프랑스 색채를 빼려 노력했던 알제리 독립 정부가 그들을 가만 놔둘리는 전무했는데, 학살 당한 아르키의 숫자가 15만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학살 이전 알제리를 탈출해 프랑스로 이민간 아르키의 숫자도 9만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톨레랑스를 과시하는 프랑스의 두 얼굴은 여기서 두드러진다. 관용을 강조하는 그들이지만 알제리 전후 처리 문제에 있어 아르키와, 알제리에 정착하여 살면서 자신들의 편을 들던 백인 피에 누아르(Pied-Noir)를 본토로 받아들이는데 에비앙협정을 핑계로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냈다. 프랑스로 이주하지 못한 이들은 알제리로 돌아가 학살되거나 난민 신세가 됐으며 프랑스로 이주하는데 겨우 성공한 이들조차 아르키의 경우 인종차별에 시달렸고 피에 누아르는 빈민층으로 전락해 프랑스 범죄조직 밀리유에 가담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피에 누아르는 알제리전쟁이 자신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며 유색인종을 증오하고 장 마리 르펜 같은 인종차별주의를 주창하는 극우 정당의 주요 지지세력이 되었다.


V2를 이룬 다국적 군단, 인종차별과 맞서는 기제


지단은 유로2000까지 프랑스를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으면서 자국 역대 최고 레전드인 플라티니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인종차별주의는 여전해 장 르펜은 2002년 대선에서 좌파의 분열 덕에 결선 투표까지 오르면서 “지단이냐, 르펜이냐 결정하라”는 자극적인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에 지단 역시 르펜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프랑스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고 응수했다. 결국 르펜은 낙선했고 유로2004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던 지단은 2006년 독일월드컵에 돌아와 골든볼을 목에 걸면서 가장 화려하게 은퇴한 레전드로 남게 되었다.


지단의 은퇴 이후 월드컵 우승후보에서 멀어졌던 프랑스는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서 1998년 월드컵 보다 더욱 심화된 다국적 군단을 꾸리고 돌아온다. 러시아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프랑스 순혈은 뱅자맹 파바르와 플로리앙 토뱅 단 둘 뿐이었다. 최종 엔트리 23명 중 무려 15명이 흑인이었다. 특히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뒤를 이을 축구계 지배자의 등극을 알린 킬리안 음바페의 어머니는 지단과 같은 알제리계였고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폴 포그바와 은골로 캉테, 블레즈 마튀디는 각각 기니와 말리, 앙골라 이민자 출신일 정도로 아프리카 올스타에 다름 없는 멤버였다.


‘톨레랑스’를 내 건 이 다국적 군단은 프랑스월드컵 보다 훨씬 우월한 경기력으로 지단도 이루지 못한 V2를 달성한다. 프랑스월드컵 대표팀이 결승전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력에 의문부호가 달렸고 홈그라운드 이점으로 평가절하된 반면, 2018년 월드컵의 레 블뢰는 16강에서 메시의 아르헨티나, 8강에서 루이스 수아레스의 우루과이, 준결승에서 에당 아자르의 벨기에 등 당대 유럽축구의 슈퍼스타들을 죄다 쓰러뜨리고 결승에서 이 해 발롱도르 수상자 루카 모드리치의 크로아티아마저 제압하면서 압도적인 기량을 자랑했다. 특히 토너먼트에서 승부차기는 물론 연장전도 가지 않고 모두 정규시간 내에 승리를 확정지은 퍼펙트 챔피언이었다.


하지만 흑인이 대다수인 프랑스 대표팀을 고까워하지 않는 인종차별의 시선은 여전하다. 프랑스 전체 인구의 7~8%도 되지 않는 흑인들이 프랑스를 대표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논리다. 이들이 내세우는 축구의 대척점은 럭비국가대표팀인데 럭비대표팀은 전원이 백인으로 포진해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럭비프로리그를 갖추고도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럭비대표팀에 비해 다국적 군단으로 이미 2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축구대표팀은 ‘능력주의’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에서도 충분히 명분이 있다.


한편 지단의 아버지인 스마일 지단은 알제리전쟁 발발 전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며 자신이 아르키라는 의혹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알제리정부 역시 이를 인정해 훈장 OMN을 그에게 수여했다. 반면 민족해방전선은 이를 부정하고 지단은 프랑스의 영웅이지, 알제리의 영웅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프랑스 인종차별 감시단체 SSO라시슴은 2006년 독일월드컵 결승전 당시 승부의 추를 바꿔놓은 지단이 이탈리아 수비수 마르코 마테라치와 벌인 이른바 ‘박치기 사건’ 때 마테라치가 지단을 가리켜 “더러운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 “더러운 테러리스트의 아들” “더러운 이슬람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측도 있었다. 마테라치는 이탈리아 세리에A 페루자 시절 상대팀도 아니고 자신의 팀 메이트인 안정환에게조차 “마늘 냄새 난다”고 인종차별을 시전 했던 인성의 소유자인만큼 충분히 설득력 있다고 받아들여졌다. 실상은 마테라치가 지단의 누나를 욕보인 것이었으나, 지단 같은 슈퍼스타도 알제리계라는 이유로 손 쉽게 인종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유럽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거듭된 성공으로 유럽축구계의 시각도 커다란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일찍이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이민자나 선수들을 받아들여 성공을 거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달리 흑인이나 아랍계 선수들을 쓰는데 인색했던 서유럽의 축구강국들도 프랑스 모델을 참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축구종주국 잉글랜드에 검은 피부를 가진 선수들은 프랑스 못잖게 늘어나고 있고, 명실상부한 유럽최강 독일에는 흑인뿐 아니라 아랍계, 튀르크족, 슬라브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팀 내 흑백갈등으로 전력보다 항상 낮은 성적을 올린다는 혹평을 받던 네덜란드도 수리남계 버질 반 다이크에 주장 완장을 맡겼다.


비로소 알제리전쟁에서 상처받았던 프랑스의 자랑 톨레랑스는 축구장 잔디 위에서 그 가치를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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