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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지훈 Oct 22. 2023

축구X세계사 Take Nine

나치와 냉전의 잔혹 동화 해피엔딩: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베를린장벽의 명소: '형제의 키스'


1989년 11월 10일 MBC 뉴스데스크는 머릿 기사로 베를린장벽 붕괴를 보도했다. 공교롭게 한국축구 사상 최고의 스타 차범근이 독일 분데스리가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날이었다. 현지 시간으로 11월 9일 오후 7시 독일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조물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당시 40년 가까이 휴전선 철조망을 두고 대립 중인 남북한에도 의미깊은 뉴스였다. 한편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베른의 기적’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무너진 민심을 회복하고 결국 다시금 세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대국으로 부활한 서독은 해빙 무드가 무르익은 시점에서 동독과의 재통일을 추진하는 ‘베른의 기적’과 같은 상징적인 이벤트가 절실했다.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 분데스리가를 보유한 나라에 그 답은 간단했다. 바로 불과 7개월 앞으로 다가온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이었다.

 

독일의 휴전선 베를린장벽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얄타 회담을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연합국 4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을 분할 통치하기로 결의했다. 문제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었는데 베를린의 상징성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베를린 도시 자체를 4개국이 분할 점령하게 되었다. 1946년 소련은 동독 지역에서 자체 선거를 실시하여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이 정권을 장악하게끔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은 소련에 전국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제의했으나 소련의 거절로 결국 1949년 미, 영, 프 3국 점령지에서만 총선이 실시되어 서독이 출범하였고 베를린은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분단되기에 이르렀다.


소련의 지배 하에 놓일 것이 두려웠던 동독 시민들이 대거 탈출하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베를린 봉쇄를 단행하여 서베를린까지 손에 넣으려 하였으나, 미국을 위시로 한 서방의 베를린 공수작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서베를린은 ‘육지의 섬’으로 남았다. 한편 서독은 루르 공업 지대로 대표되는 서부 공업 지대에서 마셜 플랜이라는 미국의 경제 지원을 받아 소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며 빠르게 국력을 회복했다. 가뜩이나 1953년 동독 봉기 등 공산주의 체제에 불만이 많던 동독 국민들은 식량난까지 겪으면서 압도적인 경제력 우위를 갖춘 서독으로 너나 할 것 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이에 스탈린의 후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8년 11월 미, 영, 프 3개국과 서독을 상대로 서베를린에서 철군하라는 베를린 최후통첩을 내렸다. 서방 지도자들은 이를 포츠담협정 위반이라고 공식적으로 거부했고 냉전 시대의 위기감이 베를린을 둘러쌌다. 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흐루쇼프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미소 정상회담이 열렸으나 사실상 결렬됐고 핵전쟁을 포함한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이 대두되는 베를린 위기가 전세계를 긴장시켰다.


1961년 상반기에만 기록적인 15만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탈주하자 8월 13일 새벽 동독군이 기습적으로 서베를린과 동독 사이 국경선을 완전히 봉쇄했다. ‘독일판 휴전선’인 베를린장벽의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케네디는 전투기 216대를 급파하며 위협했으나 소련과 동독 측이 이렇다할 군사적 대응 없이 서베를린으로의 인적 이동을 막는 장벽 건설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자 미국 1개 여단을 서베를린으로 파병하여 동독군이 베를린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는 수준에 머물렀다. 케네디의 미온적 대처에 자신감을 가진 흐루쇼프는 이듬해 쿠바 미사일 위기로 케네디 정부를 더욱 도발하며 냉전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오보 하나로 무너진 베를린장벽


독일 분단의 상징으로 30년 가까이 분단을 공고화시키던 베를린장벽도 무너지는 날이 마침내 도래했다. 1989년 동유럽혁명이 전개되면서 소련의 휘하 하에 있던 공산주의 국가들이 너나할 것 없이 민주화를 위해 전진하자 동독 역시 1989년 9월 라이프치히에서 개시된 월요 시위를 기폭제 삼아 민주화 운동이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실각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불간섭 정책으로 일관하자 다급해진 사회주의통일당의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11월 9일 오후 6시 58분에 열린 기자회견을 통하여 동서독 국경을 통한 여행자유화 정책으로 급한 불을 끄려 했다. 그런데 기자회견에서 독일 빌트지 기자가 “언제부터 국경이 개방되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샤보프스키는 “지체 없이, 즉시(Sofort, unverzüglich)”라고 관용적으로 답했다.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으나 이튿날부터 출국비자 발급이 발효될 예정이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답한 것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이 답변 하나는 거대한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이탈리아 통신사 ANSA의 기자 리카르도 에르만은 국경 ‘개방’을 ‘철거’로 오인하여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고 보도했다. 전세계 언론들은 이를 인용해 긴급 속보로 타전하며 확대 재생산되었다. 뉴스를 보던 수많은 동서독인들은 저마다 공구와 농기구는 물론 불도저,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로 무장하고 베를린장벽으로 모여들었다. 서슬퍼렇던 동독 국경경비대원들도 어마어마한 인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으면 동독 정부와 소련의 힘을 믿고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이라도 시도했겠으나 이미 ‘동유럽의 봄’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무너지는 장벽을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198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호네커는 “베를린장벽은 앞으로도 50년, 아니 100년은 갈 것”이라며 체제 유지에 대한 자신감을 강조했으나 불과 10개월도 지나지 않아 분단의 상징물은 시민들의 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베를린장벽 붕괴를 신호탄으로 동독은 빠르게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독일의 안기부’ 슈타지는 시민들의 습격으로 해체되었고 동독 마르크의 화폐가치는 1/10 이상 폭락했다. 결국 화폐 통합과 동독 지역 5개주가 서독에 가입하는 형식의 흡수통일이 이뤄지게 됐다. 1990년 8월 31일 통일조약이 베를린에서 서명되었고, 9월 12일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점령국이었던 미, 영, 프, 소의 승인으로 베를린 주권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3일 독일 통일이 선포되었다. 베를린장벽 오보가 보도된 지 불과 11개월만의 초고속 통일이었다.


잔혹 동화의 결말은 해피엔딩


이탈리아월드컵을 앞둔 서독 축구국가대표팀의 부담감도 막중했다.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첫 자유선거가 열려 공산주의가 와해되면서 통일은 눈 앞으로 다가왔고 월드컵 우승이 통일 독일에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축구 자체만 따져도 서독에는 우승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1954년 월드컵에서 우승은 서독이지만 당대 최강팀은 ‘매직 마자르’ 헝가리였고, 1974년 서독월드컵 챔피언 역시 서독이나 그 대회의 주인공은 단연코 ‘토털 사커’의 네덜란드였다. 우승을 하고도 조연에 그친 서독이 비로소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통일 독일과 더불어 희망적인 1990년대를 열어젖히는 신호탄이 될 터였다.


심지어 서독은 1982년 스페인월드컵, 1986년 멕시코월드컵을 연속으로 준우승하는 이른바 ‘콩 라인’의 주역이었다. 1990년 월드컵만 차지하면 브라질, 이탈리아를 제치고 우승 3회, 준우승 3회라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팀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서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인 프란츠 베켄바워 역시 브라질의 마리우 자갈루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선수와 감독으로 우승컵을 드는 영광을 노리고 있었다. 심지어 주장으로 트로피를 들고 감독으로 또다시 우승을 맛 보는 것은 베켄바워가 처음 리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막강한 지지를 받던 서독은 대회 초반부터 우승후보의 위용을 마음껏 과시했다. 동유럽의 강자 유고슬라비아와 만난 조별예선 첫 경기부터 캡틴 로타어 마테우스가 두 골을 터트리고, 투톱 위르겐 클린스만과 루디 푈러가 나란히 골 맛을 보면서 4-1의 대승으로 서전을 장식했다. 이어 중동의 복병 아랍에미리트는 한 수 위의 기량을 과시하며 푈러의 멀티골, 클린스만과 마테우스, 우베 바인이 한 골씩 몰아넣어 5-1로 대파하는 막강 화력을 뽐낸다. 두 경기만에 9골을 집어넣으며 일찌감치 16강을 확정지은 서독은 주전들에 휴식을 부여하면서 콜롬비아와 비기고 조 1위로 가볍게 토너먼트에 돌입한다.


하지만 조 1위를 했음에도 16강 상대는 3무로 조 3위에 그친 또다른 우승후보 네덜란드였다. 오히려 조별예선 최종전에서 서독과 겨우 비겨 조 3위로 16강 막차를 탄 콜롬비아의 상대는 무명의 카메룬이었다. 유로88 준결승에서 서독을 좌절시킨 네덜란드는 AC 밀란을 유럽 최강팀으로 탈바꿈시킨 ‘오렌지 3총사’ 마르코 판 바스턴, 뤼트 휠릿,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전성기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16강이 열리는 구장 역시 그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밀란의 홈구장 산시로였다. 16강부터 온갖 불리한 조건 속에 사실상의 결승전을 맞닥뜨린 서독이었다.


이날 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닌 중앙수비수로 출전해 푈러를 전담마크했던 레이카르트가 신경전을 벌이다 푈러에 침을 뱉으면서 전반 22분만에 퇴장당해 경기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둘의 동반 퇴장으로 숫적 열세는 없었으나 중원과 최후방을 넘나들며 폭넓은 활동량으로 네덜란드의 척추를 장악하던 레이카르트의 부존재가 더 크게 다가왔다.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고, 클린스만의 선제골과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추가골로 뒤늦게 로날드 쿠만의 페널티킥으로 추격에 나선 네덜란드를 2-1로 꺾고 8강에 오른다.


8강 상대는 동유럽의 강호인 체코슬로바키아. 경기 내내 5장의 경고를 받을 정도로 거친 축구를 펼친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고전하던 서독은 마테우스의 페널티킥 선제골과 류보미르 모라우치크의 퇴장에 따른 숫적 우세를 살려 준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문턱에서 만난 이는 오랜 견원지간 축구종주국 잉글랜드. 1986년 월드컵 득점왕 리 리네커와 에이스 폴 개스코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팽팽하던 승부는 다소 황당하게 기울었다. 후반 15분 잉글랜드 페널티아크 정면에서 프리킥을 얻은 서독의 키커 브레메는 명성이 자자한 왼발 프리킥을 시도했는데, 이걸 막아보겠다고 수비수 폴 앤드류 파커가 뛰쳐나간 것이 폴 파커의 발을 맞고 되려 솟구쳐올라 잉글랜드 백전노장 수문장 피터 쉴턴의 키를 넘겨 이른바 ‘만세 골’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타블로이드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파커는 후반 35분 오른쪽 측면을 돌파하다 얼리 크로스를 날렸고, 서독 수비진이 이를 미숙하게 처리하는 틈을 타 리네커가 재빠르게 동점골을 터트리면서 스스로 역적이 되는 일을 막아냈다.


결국 승부차기에 돌입한 양 팀은 41세의 백전노장 쉴턴과 23세의 영건 보도 일그너의 맞대결로 좁혀졌다. 3-3으로 팽팽하던 승부차기는 잉글랜드 4번 키커 노팅엄 포레스트 레전드 스튜어트 피어스의 허를 찌르는 가운데를 노린 슈팅을 일그너가 놀랍게도 발로 막아내면서 독일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어 잉글랜드 5번 키커인 명 드리블러 크리스 워들의 슛도 크로스바를 넘기면서 개스코인의 이른바 ‘가자의 눈물’과 함께 두 팀의 희비는 엇갈렸다.


결승전은 1986년 월드컵 결승의 리턴매치였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랐다. 아르헨티나는 조별예선부터 마라도나의 천재성과 골키퍼 세르히오 고이코체아의 맹활약으로 겨우겨우 토너먼트를 통과하는 신세였다. 심지어 Take Three에서 다뤘듯이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를 도발한 마라도나는 결승전이 열린 스타디오올림피코에서 공을 잡을 때 마다 야유가 터졌고 이에 심하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마라도나의 공격 파트너였던 클라우디오 카니자마저 경고 누적으로 관중석에서 결승전을 지켜보는 신세였다.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허용할 수 없었던 이탈리아이니만큼 심판 판정도 결코 아르헨티나의 편이 될 수 없었다. 카니자 대신 원톱으로 출격한 구스타보 데조티는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서독 명 수비수 위르겐 콜러와 싸우다 퇴장당했다. 아르헨티나 수비의 핵 오스카 루게리 대신 교체투입된 페드로 몬존도 다이렉트 퇴장당한다. 9명이 뛴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를 제외한 전원의 동선을 하프라인 밑으로 제한하면서 고이코체아의 승부차기로 승부의 추를 돌리려 시도했으나 후반 40분 로베르토 센시니가 푈러의 돌파를 막는 과정에서 페널티킥을 허용한다. 이 페널티킥도 논란이 되었다. 느린 그림으로 볼 때 센시니는 분명 공을 향해 발을 뻗었고 공의 소유권을 차지하였는데 뒤늦게 센시니의 다리에 걸린 푈러에게 페널티킥이 선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이 대회에서 무수한 승부차기 선방을 보인 고이코체아도 ‘왼발의 달인’ 브레메의 킥을 막지는 못했다.


이 페널티킥도 비화가 있는데, 원래 페널티킥의 1번 키커는 단연 마테우스였다. 하지만 전반전을 마치고 축구화가 뜯겨 새 신발로 갈아신고 나온 마테우스는 길들여지지 않은 새 신발이 우려되어 브레메에게 킥을 양보했다. 만일 마테우스가 원래대로 킥을 하고 혹여나 실축했다면 이 역시 엄청난 운명의 변화를 가져왔을지도 모르겠다.


탁월한 선택을 한 마테우스는 세리에A 인터 밀란의 ‘게르만 삼총사’로 마라도나의 나폴리를 넘은데 이어 월드컵마저 마라도나의 그늘을 벗어나면서 1990년 발롱도르와 처음 시상된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거머쥔다. 그리고 “동독에 계신 할아버지에게 우승컵을 바친다”는 통일 독일의 구성원 누구나 가슴 뭉클할 인터뷰를 남긴다. 월드컵 우승 이후 3개월만에 서독은 독일이 되었고 반세기에 걸친 나치와 냉전의 산물이었던 잔혹 동화는 비로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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