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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지훈 Oct 22. 2023

축구X세계사 Take Ten

로만 제국의 멸망: 푸틴의 침략과 자본의 시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특별 군사 작전을 진행할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위협을 용인할 수 없다. 작전의 유일한 목표는 돈바스의 주민 보호이기 때문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알리는 BBC 속보


한국시간으로 2022년 2월 24일 오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선언이 전 세계 속보로 타전되자 울상이 된 것은 대한민국의 개미들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이 전쟁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것 같던 영국 런던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축구팬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홈구장인 스탬포드브리지로 달려갔다. 그들이 “우리 좀 내버려둬”라고 구장 벽에 절규하듯 낙서를 휘갈긴 까닭은 그들의 구단주가 푸틴과 긴밀한 커넥션이 있는 측근이라고 오래 전부터 의심받아온 남자였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의 제국을 완성하고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된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그 장본인이다.


축구는 열 한 명이 하는 게 아니다


축구는 11명이 피치 위에서 하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나 요한 크루이프 이야기가 아니다. 1950년대에 리그에서 딱 한 번 우승해 보고 21세기가 되도록 반 세기 동안 우승 한 번 못해 본 팀. 1990년대 중후반 뤼트 휠릿, 잔루카 비알리, 지안프랑코 졸라 등 이탈리아 노장 커넥션의 반짝 활약으로 몇 개의 컵 트로피는 들어보았으나 재정난으로 그나마의 주축 선수들도 팔아야 할 위기에 빠진 팀. 같은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아스널을 라이벌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던 첼시는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생경했던 러시아 석유재벌 아브라모비치가 2003년 6월 인수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팀을 인수하자마자 에르난 크레스포,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데미안 더프 등 스타플레이어들을 영입하는데 인수비용 못잖은 1억 1000만달러를 뿌린 아브라모비치 군단은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무패 우승을 거둔 아스널에 이은 2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준우승은 아브라히모비치의 성에 차지 않았고 훗날 레스터 시티 동화의 주역이 되는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를 내치고 포르투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신화를 쓴 당시 유럽에서 가장 떠오르는 젊은 감독인 조제 무리뉴를 데려오면서 야망을 숨기지 않는다.


아브라모비치의 다음 영입들은 무리뉴의 입맛에 맞춘 것들이었는데, 일단 유로2004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무리뉴의 조국 포르투갈 축구구가대표팀 멤버인 히카르두 카르발류, 파울루 페헤이라 등과 아직 빅리그에 입성하지 못했지만 머지않아 슈퍼스타가 될 젊은 재목들인 페트르 체흐, 마이클 에시엔, 디디에 드로그바, 존 오비 미켈 등이었다.


아브라모비치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무리뉴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데뷔 무대인 2004-05 시즌에서 첼시는 프리미어리그 창립 이래 최대 승점인 95점(29승 8무 1패)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마침내 반 세기만에 리그 정상에 오른다. 아직도 깨지지 않은 한 시즌 최소실점 15점의 기록도 세웠다. 리그컵까지 우승하면서 트로피에 목 말랐던 첼시 서포터들에게 더블을 선사한다.


다음시즌도 승점 91점으로 여유 있게 리그 2연패를 달성하면서 아브라모비치와 무리뉴의 첼시는 런던 라이벌 아스널을 넘어 프리미어리그 창립 이래 절대적인 위치에 있던 알렉스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넘보는 경지까지 오르게 됐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계속 실패하자 아브라모비치의 조급증이 터지는데, 무리뉴의 색깔과 맞지 않는 스타플레이어들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영입하게 된 것이다. AC 밀란에서는 ‘유럽의 호나우두’로 불렸지만 첼시에서는 먹튀의 대명사가 된 안드리 세브첸코가 대표적이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렸지만 리그마저 우승에 실패하면서 아브라모비치의 감독 갈아치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리그컵, FA컵 더블을 달성한 무리뉴를 자르고 아브람 그랜트를 ‘바지 감독’으로 세웠지만 무관에 그치자 2002년 한일월드컵 우승 감독인 루이스 펠리프 스콜라리로 갈아치웠고 채  한 시즌도 치르지 못한 채 임시 감독 거스 히딩크로 대체해 FA컵 우승 트로피 하나만을 얻는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전문가인 카를로 안첼로티가 다음 적임자. 하지만 리그와 FA컵 더블을 달성한 안첼로티도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가져다주지 못하자 ‘제2의 무리뉴’로 불린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를 데려오면서 7년 전 무리뉴가 달성한 혁신을 불어넣길 기대했다. 정작 빌라스 보아스는 시즌을 다 치르지도 못하고 경질되었으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땜빵 감독인 로베르토 디 마테오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최강 바르셀로나를 꺾고 바이에른 뮌헨마저 넘어 마침내 숙원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 디 마테오마저 다음 시즌 3개월을 못 채우고 백수가 되었고 라이벌 리버풀의 수장이었던 라파엘 베니테즈를 소방관으로 불러 UEFA 유로파리그 트로피까지 수집한다. 결국 2003년 6월 구단을 인수한 아브라모비치의 ‘로만 제국’은 2013년 5월 정확히 10년만에 프리미어리그 구단 사상 처음으로 주요 3개 대회 트로피(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유로파리그)를 모두 거머쥐는 구단이 된다. 그 사이 첼시는 잉글랜드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인기있는 클럽으로 성장했다. 러시아 석유재벌 혼자서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이다.


포화 속으로, 로만 제국의 멸망


부임 초기부터 팀의 에이스로 모든 영광을 함께 했던 프랭크 램파드를 감독으로 세우고도 가차없이 중도에서 잘라버린 아브라모비치는 후임 감독 토마스 투헬과 2020-21시즌 자신의 두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 커리어를 함께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번이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과시했다. 아마 그의 머릿 속에는 퍼거슨이나 빌 샹클리 등 영국 축구를 대표하는 명장들의 옆에 자신의 이름이 각인되는 걸 상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꿈은 채 1년이 가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나무 줄기 잘라내듯 중도에 잘라버리던 감독들처럼 2021-22시즌 도중 첼시 구단주에서 끌려 내려오게 된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직후 러시아와 소원한 영국의 러시아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푸틴과 밀접한 관계로 알려진 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재산 압류와 부정부패에 대한 감사 요구가 들끓기 시작한 시점이다. 


결국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경영권을 모두 첼시 파운데이션에 넘기고 구단주로만 남으며 경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자산 동결 조치를 시행했고 결국 전쟁 발발 1달도 되지 않은 3월 12일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이 아브라모비치의 첼시 구단주 자격을 박탈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5월 31일 미국 사업가 토드 보엘리를 대표로 한 컨소시엄에 매각되면서 ‘로만 제국’은 2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로만 제국’을 붕괴시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본격적인 시발점은 2013년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러파와 친서방파가 공존하던 우크라이나에서 독재자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EU 가입 논의를 전면 중단하고 친러 정책을 천명하자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서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가 시작된다. 야노코비치 정부가 실탄을 사용한 폭력적 대응을 택하면서 친러정책 반대로 시작된 시위는 어느덧 독재 타도 혁명으로 급변했고 우크라이나 최고 회의는 러시아로 야반도주한 야누코비치를 탄핵하고 과도 정부를 세우기 이른다.


친러정부가 좌초되자 러시아는 무력 침공을 개시하는데 2014년 2월 러시아 해군 흑해 함대 소속 해군 보병들이 크림 반도 주요 공항 2곳을 점령한 것이다. 3월에는 대규모 병력이 투입돼 우크라이나 해군을 투항시켰고, 3월 17일 크림 자치공화국의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 및 러시아 귀속이 찬성 96.77%의 주민 투표로 타결되면서 크림 공화국으로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크림 반도 합병으로 위기감을 느낀 우크라이나 과도 정부는 친러성향을 바탕으로 분리 독립을 강하게 주장해 오던 돈바스 지역에 반군들의 무장 봉기가 시작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공습에 나서면서 8년을 끄는 돈바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결국 ‘돈바스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푸틴에 제공했고 2021년 10월부터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에 13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포진시키고 압박을 가했던 푸틴 정부는 2022년 2월 푸틴의 군사작전 선포와 더불어 침략전쟁을 개시한 것이다.


군사력의 우위로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예측 혹은 자신했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은 예상과는 다르게 팽팽한 장기전의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제사회로부터 배제와 고립을 당하고 있는 러시아가 얼마나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지와 2024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바이든 정부의 우크라이나 랜드리스 정책을 비판하며 자국의 경제 위기를 무기로 여론을 전환하려 하는 도널드 트럼프로 대변되는 공화당의 공세 등 서방국가의 지원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 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자본의 시대, 사라진 낭만


아브라모비치가 2003년 첼시의 구단주가 된 후 20년 동안 유럽 축구계는 그로 인하여 엄청난 변화에 직면했다. 이제 명장의 지략과 구단의 육성과 프랜차이즈에 대한 충성이라는 낭만의 시대는 가고 어마어마한 자본을 무기로 단기간에 역사를 쌓아올릴 수 있는 자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아브라모비치의 거대한 성공 이후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의 맨체스터 시티, 타밈 빈 하마드 알타니의 파리 생제르망, 무함마드 빈 살만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등이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중 가장 거대한 영향력과 성공을 거둔 이가 자신의 제국을 건설한 아브라모비치다.


자본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첼시나 맨시티처럼 수십년간 우승과 거리가 있던 팀들이 기존 강호들의 권력관계를 깨뜨리고 짧은 시간 내에 새롭게 명문구단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 팀의 팬들은 물론이고 정체된 리그에 투자와 긴장감을 불어넣는다는 긍정적 시너지가 있다. 헤이젤 참사 등으로 침체를 겪던 영국프로축구가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래 이와 같은 자본의 폭발적인 투입으로 스페인, 이탈리아 등을 모두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축구리그가 된 것이 자본의 시대의 미덕이다.


하지만 자본의 수준이 워낙 거대해지다 보니 이렇게 자본이 투입된 몇몇 구단이 마치 카르텔처럼 강호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중하위권 팀들은 차마 그 자리를 넘볼 수조차 없는 빈익빈부익부의 심화라는 어두운 점도 공존하고 있다. 실제로 챔피언스리그는 2004년 무리뉴의 포르투 우승 이후 20년째 빅리그의 빅클럽 외의 팀이 우승한 적이 없다. 앞으로는 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벤피카나 셀틱, 페예노르트 등 과거의 챔피언들이 과연 오일머니의 투입 없이 빅이어 트로피를 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렇게 아브라모비치는 찬사와 비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문제적 인간이었고 많은 화두를 남긴 채 극적으로 등장했다가 또 드라마틱하게 사라졌다. 그는 최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발렌시아의 인수설에 휩싸이는 등 다시 한 번 유럽 축구 구단주 도전에 나서는 모양새다. 첼시팬들은 그가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아브라모비치가 떠난 지난 시즌 첼시는 12위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올 시즌도 이대로라면 유럽대항전 복귀도 어려운 지경이다. 필요한 선수들을 거금을 들여 질러주던 아브라모비치가 없자 카이 하베르츠, 메이슨 마운트, 마테오 코바시치 등 주축 선수들이 경쟁팀인 아스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시티로 옮겨갔다. 제국이 건설되는 데는 20년이나 걸렸지만 붕괴되는 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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