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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지훈 Oct 21. 2023

축구X세계사 Take Eight

1992 여름이었다: 인종청소 악마들이 빚어낸 덴마크의 기적

“여보, 이것 좀 봐봐요. 빨리요”

덴마크의 유로92 우승을 다룬 영화: '92년의 여름'


온갖 비난 속에 스포츠 뉴스라면 치를 떨던 구레나룻이 희끗한 중년의 남자는 아내의 성화에 마시려던 커피를 내려놓고 억지로 TV 앞에 앉았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남자의 동공은 금세 커지고 브라운관 앞으로 빨려들어갈 듯 몸이 점점 앞으로 기운다. 뉴스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다급하게 수화기를 든 남자는 몇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전화를 끊고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내가 몹시 궁금한 눈으로 전화 통화에 대해 묻자 이 남자 바로 덴마크 축구국가대표팀의 수장 리하트 묄러 닐센은 꿈에서 깨어나며 입을 열었다.


“유로92에 나가게 됐어”


인종청소 악마들의 보스니아 전쟁


덴마크는 유로92 예선에서 발칸반도의 강자 유고슬라비아에 밀려 조 2위로 탈락한 상황이었다. 유로92는 참가국이 8개국에 불과했던 마지막 대회로 조 2위도 지금처럼 플레이오프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탈락하는 시스템이었다. 덴마크뿐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우승후보들도 초대받지 못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그런데 대회 참가를 불과 열흘도 남기지 않고 덴마크가 유로92에 나가게 된 것이다. 1991년 3월 시작된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가장 참혹했던 보스니아 전쟁이 대회를 불과 두 달 남긴 1992년 4월 발발했고 유고슬라비아가 UEFA의 제재로 참가 자격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 동유럽 혁명에 따라 구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구 유고)도 민주화를 통하여 각 구성국마다 자유 총선을 시행했다. 1991년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도 독자노선을 걸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다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슬로베니아 공화국이나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판이한 문제점이 있었는데, 크로아티아는 크로아티아계가 89%, 슬로베니아는 슬로베니아계가 90%를 이루고 있는 반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교를 믿는 보슈나크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이 나뉘어 민족과 종교가 얽히고 설킨 복잡한 구조였다. 실제로 총선 결과도 절대 다수 없이 이슬람의 민주행동당이 31%, 정교회의 세르비아 민주당이 26.1%, 가톨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16.1%의 지지를 얻는 등 혼돈의 미래가 예고되었다.


1992년 1월 세르비아계가 스릅스카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2월 29일 열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분리 독립을 묻는 국민 투표를 보이콧 했고,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나크계는 독립 찬성 99.7%의 지지를 얻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며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먼저 스릅스카 공화국을 선포한 세르비아계는 이에 반발했고 4월 6일 미국과 EC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승인하자 스릅스카 공화국 민병대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마침내 전쟁의 막이 오른다.


전쟁 초반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선포한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나크계가 스릅스카 공화국을 선포한 세르비아계와 맞붙는 양상은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나크계도 내분을 일으킨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으로 번지면서 더욱 복잡한 형국이 되었다. 스릅스카 공화국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던 유고 슬라비아 연방국(신 유고 연방)에 NATO 가입국의 주도로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이라는 제재가 가해지면서 유고 슬라비아의 유로92 출전도 박탈된 것이다.


스릅스카 공화국 민병대의 수장이었던 라트코 믈라디치의 사라예보 포위전을 비롯해 세르비아계가 단기간 내에 승전을 거둘 것처럼 보였던 보스니아 전쟁은 신 유고 연방의 수장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아테네 합의를 내세워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면서 크게 뒤틀린다. 반면 크로아티아계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고 수세에 몰린 스릅스카 공화국의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와 믈라디치는 보슈나크계를 무차별로 학살하는 악명 높은 ‘인종청소’를 자행한다.


대표적인 것이 1995년 스레브레니차 학살인데 무려 8327명이 학살당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제노사이드가 펼쳐졌다. 이미 사라예보 포위전을 통해 1만 2000여명의 시민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스릅스카 공화국군은 무슬림의 민족성을 뿌리뽑기 위해 남자는 무차별 학살하고 여자는 성폭행하여 세르비아인의 씨앗을 심는 전근대적이고 반인륜적인 전쟁범죄를 무한히도 반복했다. 제파 학살과 사라예보 시장 폭격을 통한 민간인 학살이 계속되자 결국 국제사회의 여론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마침내 NATO가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한 전면 공습 ‘딜리버레이트 포스’를 개시하면서 전황은 전히 뒤바뀌었다.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아 크로아티아를 공격하던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멸망했고 밀로셰비치의 편을 들던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도 반전된 여론의 물 줄기를 돌이킬 수 없다고 보고 밀로셰비치에 전쟁 지원 중단을 압박하였다.


1995년 데이턴 협정에 따라 내전종식은 급박하게 합의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해체되고 스릅스카 공화국과, 보슈나크계와 크로아티아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의 2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재편된 것이다. 1996년 3월 사라예보를 점령하던 스릅스카 공화국군이 철수하고 UN군과 러시아군이 공동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등의 근본 원인인 민족 분쟁의 씨앗은 제거되지 못한 채 외부의 강압적 조정으로 두 세력이 한 연방 내 공존하는 현재의 체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발칸반도의 화약고와도 같은 위험천만한 형국이다.


1992년 여름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덴마크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인 라우드롭 형제와 불화를 일으키며 그들의 은퇴 선언으로 유로92 예선에서 탈락하여 여론의 지탄을 받던 리하트 닐센 감독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동생 브라이언 라우드롭은 대표팀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왔지만 바르셀로나 레전드인 형 미카엘 라우드롭은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했다. 급하게 팀을 꾸린 덴마크 축구대표팀은 스웨덴 말뫼행 비행기에 오른다.


하지만 덴마크는 죽음의 조에 처해있었다. 개최국 스웨덴과 에릭 칸토나, 장 피에르 파팽의 프랑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4강에 빛나는 축구종주국 잉글랜드와 한 조에 묶인 것이다. 준결승 진출은커녕 승점 1점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첫 경기는 1986년 멕시코월드컵 득점왕에 빛나는 백전노장 게리 리네커를 내세운 잉글랜드. 에이스 폴 개스코인이 십자인대 파열로 출전이 불발된 것이 덴마크에는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그나마의 슈팅도 수문장 피터 슈마이켈이 막아내면서 득점없이 무승부. 일단 승점 1점을 확보했다.


다음 경기는 개최국 스웨덴. 홈 그라운드의 이점에다 토마스 브롤린과 마르틴 달린이라는 흑백 조합의 투톱이 위력적인 팀이었다. 실제로 2년 후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전력. 결국 후반 13분 브롤린에 결승골을 헌납하면서 0-1로 패배해 탈락 위기에 몰렸다. 슈마이켈과 캡틴 라르스 올센이 이끄는 수비진은 강력했으나 역시나 에이스 미카엘 라우드롭의 공백으로 두 경기 동안 단 한 골도 뽑아내지 못한 공격진의 날카로움이 아쉬웠다.


이제 프랑스와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반드시 승리해야만 준결승 진출이 가능해졌다. 반면 프랑스는 무승부만 거둬도 4강 진출이 가능했다. 마누엘 아모로스와 ‘대통령’ 로랑 블랑이 버틴 프랑스 포백을 상대로 골을 뽑아내기란 결코 쉬워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반 8분만에 헨리크 라르센이 이 대회 덴마크의 첫 골을 터트리면서 기적이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1991년 발롱도르 수상자 피에르 파팽이 버티고 있었다. 장 필리페 뒤랑감각적인 백힐 패스를 이어받은 파팽은 침착하게 슈마이켈의 반대쪽 포스트로 밀어넣으면서 유로84의 영웅 미셸 플라티니 감독을 기쁘게 했다. 이 때 닐슨 감독의 용병술이 적중한다. 동점골을 허용한 뒤 팀의 간판 브라이언 라우드롭을 빼고 라르스 엘스트럽을 기용하는 모험수를 둔 닐슨의 선택은 불과 12분만에 엘스트럽이 결승골을 터트리면서 드라마틱하게 보답 받는다.


유로84의 4강 신화를 재현한 덴마크지만 거기까지일 것 같았다. 스웨덴에 이어 조 2위로 준결승에 오른 탓에 결승 진출을 놓고 만나는 상대가 하필 디펜딩 챔피언 네덜란드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유로88 우승을 합작한 ‘토털사커의 창시자’ 리누스 미셸 감독과 ‘오렌지 3총사’ 마르코  바스턴, 뤼트 휠릿,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건재한데다 크루이프를 빼닮은 신성 데니스 베르캄프까지 가세해 조별예선에서 1990년 월드컵 챔피언 독일을 3-1로 완파한 막강 화력을 과시중인 팀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전에서 중도에 교체돼 자존심을 구긴 브라이언 라우드롭이 전반 5분만에 오른쪽 측면을 돌파해 올린 크로스를 프랑스전 선제골의 주인공 라르센이 또다시 머리로 받아 넣으면서 ‘붉은 다이너마이트 군단’의 이변이 예고되었다. 베르캄프가 전반 23분 폭발적인 중거리포로 응수하자 10분 만에 라르센이 혼전 중 흘러나온 볼을 중거리슛으로 연결하면서 덴마크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종료직전 코너킥 상황에서 레이카르트가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려 연장으로 향하게 됐다.


결국 승부차기에 돌입한 덴마크 키커들은 네덜란드의 명 수문장 한스  브뢰켈런을 상대로 모두 성공했고 경기 내내 네덜란드의 무수한 공격을 막아낸 슈마이켈이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바스턴의 왼쪽 구석을 향한 페널티킥을 몸을 날려 선방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결승에 오르게 된다.


이제 마지막 상대는 토너먼트의 ‘끝판왕’인 독일이다. 1990년 월드컵 챔피언으로 유로까지 싹쓸이 해 왕조를 건설할 요량인 독일은 기존 월드컵 우승 멤버에 동독의 에이스였던 마티아스 잠머까지 가세한 완전체 팀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까지 제압한 덴마크의 기세는 매서워 전반 18분만에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욘 옌센의 통렬한 오른발 강슛이 독일 수문장 보도 일그너가 손 쓸수도 없이 골문을 갈랐다. 동점골을 노린 독일의 일방적인 공세에 밀리던 덴마크는 후반 33분 역습 상황에서  빌포르트가 안드레아스 브레메와 토마스 헬머라는 세계적인 수비수들을 헤집고 골대를 때리고 들어가는 추가골까지 터트리면서 독일 전차를 고철로 만들어 버렸다.


덴마크의 수호신 슈마이켈은 결승에서도 위르겐 클린스만의 골이나 다름 없는 중거리포를 막아냈고 테판 로이터의 1대1 상황과 카를하인츠 리들레의 헤딩슛까지 모조리 선방하면서 유로60의 레프 야신이 빙의된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슈마이켈은 1992년 발롱도르 5위에 올랐고 월드사커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도 골키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포디움에 들면서 1990년대 최고 수문장으로 우뚝 섰다.


유로92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덴마크는 단 한 번도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대회에서도 덴마크를 우승 후보로 평가하는 언론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고 슬라비아의 내전이라는 비극적인 기회를 기적과도 같은 우승으로 뒤바꾼 1992년 여름의 반전은 축구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우승으로 앞으로도 계속 회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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