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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지훈 Oct 19. 2023

축구X세계사 Take Five

그라운드의 모차르트의 죽음: 나치가 지워버린 최초의 슈퍼스타

“왈츠다! 왈츠를 추고 있어”

2004년 오스트리아에서 발매한 신델라의 기념우표. MATTHIAS에서 'T'가 빠져있다


1938년 4월 3일, 오스트리아 빈의 프라터스타디움에서 지금 막 자신의 마지막 A매치 골을 터트린 슈퍼스타가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빈 왈츠’를 추면서 골 세리머니를 시작했다. 경기 내내 침묵했던 오스트리아 관중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들의 조국 이름을 요란하게 합창하고 있었다. 1주일만 있으면 이름조차 불리지 않을 “오스트리아!”를 목 놓아 외치는 그 관중들이 손에 너나 할 것 없이 들고 있는 것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깃발. 왈츠 세리머니를 지켜보던 스타디움 정중앙 VIP석에 자리한 나치 간부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앞에서 용감하게 왈츠를 출 수 있던 이유는 골을 터트린 주인공이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이후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이었을 마테아스 신델라였다.


그라운드의 모차르트


흔히 2000년대 중후반 체코의 축구 아이콘이었던 플레이메이커 토마시 로시츠키를 ‘그라운드의 모차르트’라고 칭하곤 하는데, 사실 그 원조는 모차르트의 나라 오스트리아가 낳은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 신델라의 것이다. 흔히 현대 축구를 정의하면서 최초의 슈퍼스타로 전편에서 다룬 '이탈리아의 종마' 주세페 메아짜를 꼽는데, 적어도 1934년 월드컵 이전까지 이에 대한 해답은 신델라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로시츠키가 전성기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에서 보냈듯, 1932년 아스널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활약하던 신델라에 무려 4만파운드의 이적료를 제시한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냐면 당시 신델라는 29살이었다. 지금도 노장에 가까운 29살이지만 20대 중후반이면 은퇴를 앞뒀던 100년 전을 생각하면 전성기가 다 지난 노장에 말도 안 되는 이적료를 투자한 것이다. 심지어 당시 영국은 축구종주국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월드컵도 출전하지 않고 외국 선수들의 능력도 인정하지 않는 때였다. 또한 이 이적료가 얼마나 거대한 것이냐면, 당시 세계최고 이적료는 같은 해 아르헨티나 공격수 베르나베 페레이라가 티그레에서 리베르 플라테로 이적하면서 기록한 2만 3000파운드였고 이 기록은 1949년에서야 깨진다. 즉 20년동안 누구도 깨지 못한 수준의 이적료의 2배 가까운 금액을 29살의 노장에 제시했으니 신델라의 가치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가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애국심이 남달랐던 신델라는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아우스트리아 빈에 남았고 당시의 UEFA 챔피언스리그와 흡사했던 미트로파컵 결승에서 떠오르는 23살의 신성 메아짜의 암브로지아 인테르(인터 밀란의 전신)와 만나 해트트릭을 터트리며 우승컵을 안는 역사를 창조한다.


이제 남은 것은 1934년 이탈리아월드컵 뿐이었다. 이탈리아 명장 비토리오 포초와 라이벌리를 형성했던 후고 마이슬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축구국가대표팀은 1931년 5월부터 1933년 4월까지 12번의 A매치에서 10승 2무에 무려 53골을 터트려 ‘분더 팀(Wunder Team: 경이로운 팀)’으로 불린 당대 최강의 팀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31살에야 첫 월드컵을 맞이하는 신델라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다뤘듯 이탈리아월드컵은 이탈리아의 우승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선전하기 위해 철저히 계획된 대회였고,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오스트리아는 준결승에서 이탈리아에 무릎을 꿇었다. 최초의 월드컵 유럽 챔피언으로 역사에 남을 것으로 여겨졌던 신델라의 대관식도 아르헨티나에서 귀화한 이탈리아의 센터 하프 루이스 몬티의 격투기와도 같은 수비와 함께 쓸쓸히 막을 내렸다.


마지막 1938년 월드컵 그러나 사라진 조국


이탈리아월드컵이 끝나고 이제 30대 중반의 노장이 되었지만, 신델라는 1936년 다시 한 번 빈을 미트로파컵 우승으로 이끌면서 건재함을 과시한다. 이제 남은건 1938년 프랑스월드컵에서의 ‘라스트 댄스’. 축구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신델라였지만 얼마든지 본선에서 활약할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축구계 최초의 슈퍼스타 자리도 메아짜에게 얼마든지 다시 빼앗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나라가 없어진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면서 독일과의 통일을 늘상 부르짖던 오스트리아나치당은 이에 힘입어 수차례 테러를 감행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연방국 초대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나치당을 해산하면서 맞섰다. 이에 나치당원들은 1934년 수상관저에서 돌푸스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후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가 이를 진압하면서 나치당의 3일 천하는 막을 내렸다.


1938년 히틀러는 슈슈니크를 자신의 산장으로 초대하여 오스트리아나치의 수장인 아르투어 자이스인크바르트를 내무장관 자리에 앉힐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무된 나치당의 과격한 테러로 치안이 불안해지자 슈슈니크는 국민 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 독립의 명분을 확보하려 한다. 격분한 히틀러는 국민 투표 중지와 자이스인크바르트에 총리직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며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제압할 것을 지시한다.


결국 슈슈니크는 국민 투표를 중지하고 자이스인크바르트에 수상직 이양을 약속하는 ‘굴복’의 라디오 방송을 내 보내고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에 진입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인 린츠를 방문하고 4월 10일 국민 투표를 통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묻는다. 무장한 독일군이 주둔한 삼엄한 분위기에서 펼쳐진 국민 투표의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 97%의 찬성으로 이제 지도 상에서 오스트리아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나치 앞에서 추는 라스트 댄스


즉 서두에서 등장했던 프라터스타디움에서의 A매치는 오스트리아라는 이름을 건 마지막 경기였다. 나치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기있던 스포츠인 축구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화합이라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한 신델라도 불러들였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슈퍼스타였으니 그 선전효과가 얼마나 대단할지는 자명했기 때문이다.


신델라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다. 그는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전통적 유니폼인 흰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가 아닌 오스트리아의 국기 색깔을 형상화한 레드-화이트-레드의 유니폼을 착용하자고 선수들을 설득했다. 화합의 한마당이었기 때문에 사이좋게 0-0으로 끝마치면 흡족했을 나치 앞에서 끝내 골을 터트리고 월드컵에서의 라스트 댄스가 아닌 오스트리아의 ‘라스트 댄스’를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물론 신델라에도 기회가 있었다. 1934년 월드컵을 통한 무솔리니의 파시즘 선전에 고무된 히틀러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통하여 나치즘 선전에 열을 올렸지만 정작 자신들의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축구에서는 모두 이탈리아가 우승컵을 앗아가는 형국을 보고만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인재인 신델라를 독일 축구국가대표팀에 집어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35세에 이른 신델라는 고령을 이유로 이를 고사한다. 유대인인 신델라의 거절 이유를 곧이 곧대로 믿을 이는 드물었다.


나치는 오스트리아 축구협회를 해체하고 오스트리아리그까지 파행으로 이끈다. 특히 유대인 선수들은 강제로 계약이 종료되었고 임금도 받지 못한 채 도망치듯 오스트리아를 떠났지만 신델라는 아우스트리아 빈에 남았다. 유대인 선수들의 출전이 제한되면서 축구계를 떠난 신델라는 다수의 유대인들이 남기고 떠난 재산들을 불법적으로 취득하는 행태가 만연한 가운데 ‘안나호프’라는 카페를 2만마르크에 제 값을 주고 매입하고 새 삶을 살기로 한다. 나치당에 가입하면 축구영웅으로 대접받으며 편안한 여생이 약속되었으나 결코 그러지 않았다.


신델라의 죽음 잊혀진 슈퍼스타


결국 합병 1년도 지나지 않은 1939년 1월 23일, 만 35세의 젊은 나이의 신델라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공식적인 사인은 굴뚝이 막혀 퍼진 일산화탄소로 인한 중독사. 동침한 여자친구 카밀라 카스토뇰라도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신델라의 굴뚝이 손상되지 않았다고 확인했으며, 일산화탄소 중독사가 비일비재했시절이었지만 신델라처럼 성공한 유명인사가 그렇게 사망하는 일은 결코 흔치 않았기 때문에 온갖 음모론이 들끓었다.


2003년 BBC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신델라의 오랜 친구 이곤 울버히는 당시 빈의 지역 공무원이 뇌물을 받고 신델라의 죽음을 사고사로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시나리오 작가 프리드리히 토르베르크는 ‘한 축구 선수의 죽음에 관하여(Auf den Tod eines Fußballers)’라는 시를 통하여 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한 신델라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추측했다.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평소 나치당에 반기를 들던 그가 빈을 탈출하려 하자 살해했다는 음모론도 팽배했으나 조나단 윌슨은 ‘축구철학의 역사’에서 이를 풍문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귀결되면서 1943년 모스크바 선언을 통하여 연합국은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무효화시킨다. 종전 후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4개국에 의해 분할통치되던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난 1955년에서야 주권을 회복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델라 시대의 전성기를 맞아본 적이 없고 유럽 축구의 메인스트림에 오르지 못했다. 헤게모니를 앗아오지 못한 결과는 신델라의 이름마저 희미하게 만들었고 세계 축구계는 현대축구 최초의 슈퍼스타로 신델라가 아닌 메아짜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기고 있다.


단 한 번 오스트리아 축구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는데 결코 좋은 쪽은 아니었다. 마라도나의 눈물로 기억되는 1982년 스페인월드컵에서 같은 조에 속한 서독과 오스트리아는 최종전에서 맞닥뜨리는데 상황이 묘했다. 우승후보였고 실제로 이 대회 준우승을 거머쥔 서독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아프리카의 무명 알제리에 첫 판에서 1-2패라는 충격적인 이변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미 2승으로 12강을 확정지은 오스트리아와 최종전을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서독의 마지막 경기에서 월드컵 역사에 남는 치욕이 벌어진다.


5년을 같은 나라로 보낸 게르만 민족의 후예끼리 사이좋게 12강에 올라가자는 것인지, 서독이 전반 10분만에 호르스트 흐루베쉬의 선제골을 터트리고 경기 종료 시까지 양 팀은 무의미한 공돌리기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히혼의 수치’라고 명명된 월드컵 사상 최악의 져주기 게임을 통해 알제리는 2승을 하고도 조별예선에서 탈락한다. 온갖 비난이 터지자 이 대회를 기반으로 FIFA는 모든 대회의 조별예선 최종전을 같은 시간에 편성하여 이러한 짬짜미를 미연에 방지하기로 룰 자체를 변경했다. 이는 유럽 메이저리그의 최종전도 같은 시간에 편성하여 우승 등을 놓고 부정행위가 발생하지 않게 방지하는 초석이 되었다.


신델라의 후예들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조별예선 탈락한 이래 30년 가까이 월드컵 본선조차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영원히 남았지만 '그라운드의 모차르트'의 이름은 그렇게 쓸쓸히 잊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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