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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지훈 Oct 17. 2023

축구X세계사 Take Three

마라도나의 처연한 몰락: 이탈리아의 강북강남

“아니 지금 내가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인가”

마라도나의 다큐멘터리: '디에고'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운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구에린 스포르티보 등 이탈리아 축구기자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의 눈과 귀는 이 시대 최고의 축구스타가 금방 내뱉은 혁명적 선언에 이게 꿈은 아닌지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마치 정치인이 연설을 하듯 특유의 카리스마로 기자회견장을 사로잡은 이는 곧 펠레의 경지가 눈 앞으로 다가온, ‘축구신동’에서 ‘축구황제’로 호칭을 갈아치울 시점이 임박한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나폴리 시민들이여, 당신들은 아르헨티나를 응원해야 한다. 그동안 북부 인들에게 핍박만 당하고 살지 않았나. 이탈리아가 아닌 아르헨티나를 응원해 달라. 내가 당신들 대신에 잘난 이탈리아 북부 대표팀을 쓰러뜨리겠다”


이 도발적 발언을 마라도나는 바로 개최국 이탈리아와 벌일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준결승전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쏟아내고 있었다. 조국이 아닌 조국과 사투를 벌일 타국의 에이스가 던진 자신들을 응원하라는 외침,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은 하필이면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준결승전이 나폴리의 홈구장(심지어 이제는 그 이름마저 디에고아르만도마라도나스타디움인)에서 열리기 때문이었고, 그 에이스 마라도나가 나폴리 팬들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영웅을 넘어 ‘신’과 같은 존재인 까닭이었다.


이탈리아의 강북강남


그렇다면 마라도나는 어떻게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를 무기로 큰 경기를 앞두고 도발을 시전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는 우리의 강북강남을 넘어 남과북 이상으로 사회적 괴리가 큰 이탈리아의 남북문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의 주도로 1861년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을 맞이하였으나, 이는 북부 사르데냐-피에몬타 왕국의 지배로 이루어진 바 남부에서는 브리간타조(도적떼라는 뜻) 반란군이 게릴라전을 벌이는 등 시작부터 간극은 존재했다. ‘헤게모니’로 유명한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통일이 북부로 상징되는 부르주아 계층의 혁명에 머물고 남부로 대표되는 민중을 포함시키지 못한 반쪽짜리 통일이었다고 격하하며, 이에 따라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고착되고 남부 농민들을 이탈리아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발적으로 끌어들여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 강압적 계몽을 통한 근대적 발전의 강요에 그쳤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근대 시민사회로의 강압적 계승은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파시즘을 불러오는 태제가 되고 말았다.


또한 통일 자금 확보를 위해 곡물세 등을 통한 고세율 농업세를 부과해 남부 경제를 착취하면서 시칠리아와 나폴리 등 이탈리아 남부 농민들의 대응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시칠리아 좌익운동에 영향을 준 ‘파시’운동(Fasci siciliani)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적 정부를 불신하며 가족주의로 똘똘 뭉친 거대 범죄조직 마피아였다. 특히 마피아는 남부의 경제적 빈곤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들과 무솔리니의 탄압으로 역시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로 도망친 폭력조직의 급증으로 세계적인 규모의 범죄집단이 되었다. 금주법 시대에 날개를 단 마피아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축적했고 알 카포네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2012년 자료에 따르면,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은 22000유로 정도의 가처분소득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서유럽의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나 남부 도시들은 12000-13000 유로 수준으로 국가 부도 위기를 맞은 그리스나 포르투갈, 시장경제를 받아들인지 얼마되지 않은 동유럽의 헝가리, 불가리아와 엇비슷한 레벨이다. 패션의 성지로 불리는 밀라노를 비롯하여 로마, 피렌체 등 우리에도 익숙한 대표적인 제조업과 상업의 중심지는 죄다 북부에 몰려있는 반면, 오랜기간 농경사회에 정체된 남부는 영세한 소규모 기업과 그나마 천혜의 자연조건 덕에 벌어들이는 관광수입이 전부인 실정이기 때문이다.


북부동맹 등 대놓고 이탈리아 북부의 분리독립을 주창하는 정당이 집권당이 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어느 한 부문을 빼놓지 않고 남북문제는 이탈리아가 처한 가장 심각하고 가장 오래된 사회문제임이 틀림없다. 마라도나가 파고든 지점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었다.


우리의 조국은 이탈리아입니다


하지만 마라도나의 도발이 오판으로 밝혀지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마라도나의 이름을 달기 전 스타디오산파올로에서 열린 1990년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나폴리 홈 팬들은 “마라도나,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조국은 이탈리아입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아무리 나폴리의 3대 명물인 마라도나라지만 언젠가 떠날 이방인 보다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택한다는 울림이었다.


경기 역시 마라도나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서른 즈음에 전성기가 지나가고 있는 마라도나 혼자서 판도를 뒤집을 만큼 이탈리아의 전력은 만만치 않았고 아르헨티나의 스쿼드는 우승후보라기엔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골키퍼 왈테르 젠가를 필두로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주세페 베르고미, 리카르도 페리로 구성된 월드컵 역사상 전무후무한 포백라인을 갖춘 이탈리아의 '카데나치오'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월드컵 역대 최장시간 무실점 517분을 기록중인 완벽한 철옹성이었다.


가뜩이나 도발적인 발언으로 마라도나가 공만 잡으면 아우성이 터지고, 이탈리아의 살인적 태클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이 희대의 천재는 찰나의 틈을 뚫고 자로 잰 듯한 크로스를 날렸고 공교롭게 이 크로스가 발은 역대급으로 빨랐지만 좀처럼 헤딩에는 재능이 없던, 클라우디오 카니자의 이마가 아닌 뒤통수에 맞으면서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도 풀렸고 마라도나에 본때를 보여주려던 관중들의 기대도 무너졌다.


결국, 브라질을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4번이나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노렸던 이탈리아의 꿈은 무너졌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는 최근 4번의 월드컵에서 3번이나 결승에 오르는 혁혁한 전과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펠레의 경지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던 마라도나의 꿈은 준결승을 앞두고 이탈리아의 민족 감정을 자극한 괘씸죄가 반영된, 조금은 찜찜한 판정으로 독일에 페널티킥 결승골을 내 주면서 좌초되었다. 심지어, 결승전이 열린 곳은 이탈리아 북부의 핵심인 로마의 스타디오올림피코. 자타공인 세리에A 최고의 슈퍼스타지만 마라도나가 공만 잡으면 야유와 욕설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눈물로 1990년 월드컵을 마감한 마라도나. 하지만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그 때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텅 빈 공항, 마라도나의 몰락


월드컵 직후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의 설문조사에서 마라도나는 이탈리아의 모든 정치인과 유명인을 통틀어 가장 싫어하는 인물로 뽑혔다. 요동치는 여론에 언론, 사법체계, 세무당국 모두 가만있을 수 없었다.


특히, 마라도나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코카인 스캔들’이었다. 이탈리아 남북문제로 잉태해 미국의 금주법을 발판으로 세계적인 범죄조직으로 성장한 마피아가 이탈리아 남부 최고의 이슈메이커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나폴리를 기반으로 한 이탈리아 3대 마피아 카모라의 수장 카르미네 줄리아노는 마라도나에 코카인을 제공하는 루트였고, 1980년대 이탈리아의 전투적인 축구에 하루도 몸 성할 일이 없었던 마라도나는 육체적 고통과 지나친 언론의 관심에 따른 스트레스를 마약으로 풀면서 점점 중독돼 가는 악순환의 메커니즘이었다.


경찰과 사법당국의 본격적인 수사가 개시되면서 그동안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모두 모른 척 했던 마라도나의 마약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카모라의 마약공급책이 마라도나에 마약을 제공한 증거가 경찰의 도청에 의해 포착되었고, 매춘부들도 마라도나가 자신들에 마약을 권했다며 증언해 마라도나는 단순한 복용 목적의 마약 소지가 아닌 ‘거래 목적의 마약 소지’로 기소되기에 이른다. 결국 1년 2개월의 집행유예와 벌금 500만리라의 실형에 처해진다.


도핑테스트 역시 그동안 카모라와 코라도 페를레노 나폴리 구단주의 조작 속에 문제없이 넘어가던 마라도나였으나 결국 1991년 3월 17일, SSC 바리와의 세리에A 25라운드 경기를 승리로 이끈 뒤 금지 약물 복용이 드러나 그대로 세리에A 생활을 종지부찍게 된다. 세리에A 뿐만 아니라 FIFA에서도 철퇴를 내리면서 마라도나는 1992년 6월 30일까지 15개월동안 그 어떤 팀에서도 선수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폴리에 처음 갔을 때는 85000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떠날 때는 완전히 혼자였다"


201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디에고(DIEGO MARADONA)'에서 마라도나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쓸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회상했다. 단 한 번의 세리에A 우승 경력도 없던 하위권팀 SSC 나폴리에 두 번의  리그 우승(세 번째 우승은 33년이 지나서야 김민재가 이뤄냈다)과 코파이탈리아, 수페르코파이탈리아나 우승,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 한 차례도 없는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대항전 우승(1988-89 UEFA 유로파리그)을 안긴 ‘인간’ 마라도나는 ‘신’의 경지를 눈 앞에 둔  직전에서 작열하는 태양에 밀랍이 녹아 끝도 없이 추락한 이카루스처럼 처절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마라도나는 다시는 월드클래스 급의 기량을 보이지 못한다. ‘라스트 댄스’를 기약하며 마지막으로 나선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도 34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맹활약을 펼쳤지만, 또다시 2경기 만에 도핑테스트에서 금지약물이 검출되면서 ‘신’이 아닌 ‘악마’로 쓸쓸하게 퇴장하고 만다.


만약 마라도나가 이탈리아월드컵 준결승전을 앞두고 이탈리아를 도발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1990년 월드컵 우승까지 아르헨티나의 품에 안기고 절정의 기량을 뽐내며 마지막 전성기이던 1990-91, 1991-92 시즌에도 정상적으로 뛰어 나폴리에 1-2개 트로피를 더 안겨 주었다면, 메시가 등장하기 전까지 축구팬들의 오랜 떡밥이었던 ‘펠레 VS 마라도나’는 논란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바르셀로나 시절 ‘빌바오의 도살자’ 안도니 고이코에체아에 살인적 태클을 당하지 않아 계속 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더라면, 그렇게 마피아와 연결고리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IF를 남기고 눈을 감은 마라도나의 죽음 2년 뒤 그의 퇴장 이후 가장 위대한 족적을 남긴 후배이자 제자, 리오넬 메시가 36년만에 마라도나가 이루지 못한 3번째 월드컵 우승을 마침내 달성하고 1986년 멕시코월드컵 당시 그의 우승 세리모니를 헌정한다. 인간으로서 닿지 못한 천상에서 울부짖었을 그의 외침이 또렷하게 귓가에 맴도는 것은 단순히 착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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