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지훈 Oct 17. 2023

축구X세계사 Take Two

마라도나의 눈물: 포클랜드 전쟁의 양치기 소년

“디에고! 이걸 보라고... 이게 뭔가? 이게”

포클랜드 전쟁을 다룬 영화: '1982: 말비나스 전쟁'


황급히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아르헨티나 명문 리베르 플라테의 젊은 슈퍼스타 라몬 앙헬 디아스였다. 사색이 된 듯한 얼굴의 그가 방바닥에 펼쳐놓은 것은 1982년 5월 25일자 스페인 일간지들이었다. 그의 눈물 섞인 탄식을 지켜보다 황망한 표정으로 기사 표제들을 빠르게 훑는 이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단짝이었던 공격수 디에고.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도대체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분노한 건지, 슬퍼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디아스를 쳐다보는 갈색 눈의 그는 바로 축구신동의 역사적인 월드컵 데뷔를 불과 며칠 앞둔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였다.


더러운 월드컵을 씻어줄 축구신동의 데뷔무대 


Take One의 요한 크루이프 편에서 살펴봤듯 1978년 월드컵의 아르헨티나는 호르헤 비델라의 시나리오 하에 만들어진, 아르헨티나 국민 이외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월드 챔피언이었다. 특히 그 시나리오의 대표적 희생양이었던 아르헨티나의 라이벌 브라질은 4년 후 월드컵에서 복수의 칼날을 누구보다 고대하고 있었는데, ‘마법의 4중주’라 불린 코임브라 지코, 소크라테스, 호베르투 파우캉, 토니뇨 세레조로 구성된 스쿼드는 펠레의 마지막 무대였던 1970년 멕시코월드컵 이래 가장 강력하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도 자신하는 까닭이 있었다. 4년 전에 정치적 음모로 불명예의 우승을 거머쥐었다면 이번에는  실력으로 그 자리를 지켜 이탈리아와 브라질만 해 본 백투백 세계 챔피언을 차지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감의 원천은 바로 세계가 주목하는 21살의 축구천재 디에고 마라도나의 존재였다.


1978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수장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는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마라도나가 군사정권의 압박과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과도한 기대를 버티지 못할 것으로 우려하여 17살에도 이미 아르헨티나 온 국민이 기대하던 특급 유망주 마라도나를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이듬해 일본에서 열린 1979년 U-20월드컵에서 앞서 등장한 라몬 디아스와 압도적인 기량으로 아르헨티나를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으며 MVP에 등극해, 컬러TV가 보급된 1980년대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이제 아르헨티나에 제대로 된 우승컵을 안기고 펠레와 양대산맥을 이루며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자긍심을 드높여줄 월드컵 데뷔 무대를 코 앞에 둔 마라도나의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게 만든 건 월드컵을 앞둔 설렘이 아니라 바로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항복했다는 스페인 신문들의 속보 뭉치였다.


월드컵 우승 next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기대대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지만 그의 예상만큼 기대효과는 크지 않았다. 월드컵 허니문으로 잠깐의 지지율 회복은 있었으나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페론주의의 반대편에서 신자유주의를 급박하게 받아들인 아르헨티나 경제에 치명타를 가져왔고, 무엇보다 1980년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의 고금리 정책이 발표되면서 아르헨티나의 재정난이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월드컵 우승으로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회복하지 못한 비델라는 쿠데타 5년 만인 1981년 3월 왕좌에서 내려오고, 그의 쿠데타에 참여했던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6개월만에 대통령직을 이어받게 된다. 갈티에리가 이어받은 것은 단순히 대통령직만은 아니었는데, ‘더러운 전쟁’으로 명명되는 인권탄압은 여전했고 경제난에 따른 국민들의 군부정권에 대한 반감과 민주화에 대한 열의도 더욱 뜨거워졌다.


이러한 내부 균열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그라운드의 전쟁’ 축구로도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갈티에리의 군사정권이 다음 꺼내든 패는 ‘진짜 전쟁’이었다. 영국과 영유권을 두고 정기적 회담을 갖던 포클랜드가 그 매개체로 지목되었으며 스페인월드컵이 열리기 3개월 전인 1982년 3월 “영유권 문제 해결 의사가 없다면 교섭을 중단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향후 모든 수단을 취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영국에 전달하면서 전쟁의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같은해 3월 19일, 아르헨티나 고물상 콘스탄티노 다비도프가 고철 수집을 명분으로 포클랜드 제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최초의 충돌이 야기되었다. 이어 4월 2일, 아르헨티나 해병대 4000여명이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침공하자 10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영국 해병대는 별다른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의 계산은 이렇다 할 무력충돌 없이 포클랜드를 점령하면 대서양 건너 멀리 자리한 영국이 무리해서 전면전에 나서지 않고 협상으로 대체해 단시간에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악화된 국내여론을 전환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쇠락한 대영제국이었으나 그 수장은 결코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바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였기 때문이다.


The Empire Strikes Back


‘보수당의 매파’로 불린 대처 역시 경제 위기로 점철된 국내상황에 자국의 영토가 침해당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즉, 정치적 위기를 외부의 상황으로 타개하겠다는 계산은 갈티에리만의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르헨티나의 계산 착오가 두드러진다. 대처는 아르헨티나와의 외교 관계를 즉시 단절했고 상·하원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전쟁이 승인되었다.


다급해진 아르헨티나가 손을 뻗은 것은 미국이었다. 애시당초 1976년의 쿠데타도 미국 CIA의 지원 속에 이뤄진 만큼 아르헨티나의 우파 군부 정권은 남아메리카에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했던 미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역시 미국의 우방이었으며, 아르헨티나의 침략 전쟁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악화된 이상 침략국 아르헨티나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결국 4월 말, 미국마저 영국을 공개 지지하면서 아르헨티나는 가장 강력한 지원국을 잃게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대처는 아르헨티나와 인접한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찾아가 칠레 영공에 영국 전투기를 배치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영국은 포클랜드의 활주로에 폭격을 가하는 '블랙 벅' 작전으로 아르헨티나의 공중전력을 상당 부분 쇠퇴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대항해시대의 주역답게 처칠급 공격원잠 HMS 컨커러로 상대의 해군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를 격침시키면서 하늘과 바다 양쪽에서 우위를 찾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땅. 5월 21일, 영국군이 동포클랜드 서북쪽의 산 카를로스만 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영국은 하늘, 땅, 바다 모두 우세한 형국을 확보하게 되었다.


영국의 승리와 아르헨티나의 양치기 소년


아르헨티나는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해군 42형 구축함 HMS 셰필드를 격침시키는 이른바 ‘셰필드 쇼크’로 마지막 발악에 나섰으나 엑조세 미사일 단 한 발로 대영제국이 자랑하는 센토어급 항공모함 HMS 허미즈를 격침시킬 수는 없었다. 월드컵을 코 앞에 둔 6월 중순께 영국군 최후의 공세가 개시되었고 결국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텀블다운산 전선이 붕괴되면서 두 달에 걸친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르헨티나 지도층은 이미 미국의 지원이 수포로 돌아갔을 무렵부터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묘한 언론통제로 ‘라틴 아메리카 자유진영의 선봉장’이자 영국을 격퇴한 전쟁영웅으로 자신들을 포장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최후의 발악 때 마지막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해군의 인빈시블급 항공모함을 격퇴했다고 발표한 것인데,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엑조세 미사일과 그에 이은 스카이호크 4기 편대의 마지막 발악은 완전한 실패로 영국군에 조금의 데미지도 주지 못한 채 그대로 패배로 직결하였다.


이러한 양치기 소년과 같은 거짓 보도들은 스페인으로 향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쟁에서 이기고 월드컵도 제패하여 19세기 세계에서 손 꼽히는 강국이던 아르헨티나의 '화양연화'를 재연하고 싶었던 그들의 앞에는 연일 패배로 이어지는 아르헨티나의 전황이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마라도나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기자회견은 어느 순간 전쟁에서 처참히 밀리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현실에 대한 꼬집음으로 이어졌다.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젊은이들에게 이와 같은 괴리는 훈련에 전혀 집중할 수 없는 핸디캡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주전 윙어였던 다니엘 베르토니는 “젊은 선수들은 훈련에서 혼이 나간 모습이었고 훈련이 끝나면 호텔방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며 “방문 틈새로 흐느끼는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축구신동의 화려한 데뷔전은 군사 정권의 오판으로 이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몰락과 마라도나의 눈물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한 것처럼 꾸며 군중들의 환호를 받던 갈티에리는 결국 패배가 들통났고, 대통령 취임 6개월 만에 권좌에서 내려오는 수모를 맛본다. 이어 레이날도 비그노네가 뒤를 이었으나 그 역시 1년 여만에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1983년 대선에서 급진시민연합의 라울 알폰신이 당선되면서 비델라의 쿠데타로 시작된 페론 사후 군사정권의 독재는 7년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1978년 월드컵으로 이어나가려 했던 군사정권의 얄팍한 정통성은 공교롭게 다음 월드컵에서 거짓 보도가 들통나면서 결국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다.


군사정권의 몰락만큼이나 그들의 지지를 받던 축구 대표팀의 추락도 가팔랐다. 마라도나의 원맨쇼가 펼쳐졌지만 이미 사기가 저하될 대로 저하된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월드컵 데뷔전이었던 조별예선 첫 경기 벨기에전부터 0-1 패배로 시작한다. 이후 헝가리, 엘살바도르를 차례로 제압하면서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의 이름값이 발휘되는가 했으나 벨기에전 패배의 후폭풍으로 12강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 브라질과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죽음의 조에 처하면서 축구신동의 데뷔무대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첫 경기인 이탈리아전에서 세리에A를 대표하는 1대1 마크의 달인인 클라우디오 젠틸레의 거친 수비에 막혀 기대만큼의 활약을 펼치지 못한 마라도나는 이제 숙적 브라질과의 대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월드컵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 꼽히는 강팀인 1982년 브라질을 상대로 마라도나 혼자의 분전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자제력을 잃은 마라도나는 브라질 미드필더 바치스타 다 실바의 배를 발로 차면서 레드카드를 받는다. 펠레의 재림을 기대했던 21살 마라도나의 엔딩은 눈물을 흘리며 쓸쓸히 경기장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결국 정의롭지 못했던 아르헨티나의 1978년 월드컵 우승은 ‘사필귀정’이듯, 축구도 정치도 몰락의 길을 걷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마라도나만큼은 4년 후 ‘그라운드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신의 손과 신의 발로 한 골씩 집어넣으며 결국 축구영웅전설의 절정을 쓰게 되므로 이번의 눈물이 비극으로 끝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마라도나라는 영웅의 서사를 풍부하게 해 주는 재료가 되었으니 ‘사필귀정’이 아니라 ‘새옹지마’가 옳은 표현인 것인가...

이전 01화 축구X세계사 Take One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