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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버지'가 되지 못한 '한국의 로베르토 바조'

Take One: 국가부도의 날

by 간지훈

“대우그룹은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 중 16개를 매각하고 남은 25개 회사 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했습니다”

IMF 사태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


1999년 8월 26일, 지상파 3사의 메인뉴스 헤드라인은 죄다 재계 서열 4위의 공룡 대우의 몰락을 보도했다. 불과 1년 전인 1998년 삼성마저 제치고 재계 2위에 등극했던 매머드의 침몰은 재계 14위 한보의 부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파를 온 국민에 던져줬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며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재벌마저 쓰러뜨리는 IMF 경제 위기의 한복판에서 ‘해버지’가 될 수 있었던 한국 축구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는 한 남자의 운명도 크게 뒤틀렸다. ‘한국판 판타지스타’ 바로 안정환이다.


국가부도의 날


대한민국 개국 이래 가장 커다란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IMF 외환 위기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부터 비롯됐다.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와 미국 달러 사이의 고정환율제가 유지되지 못하면서 바트의 가치가 폭락하는 ‘똠얌꿍 위기’가 발생했다. 이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로 연쇄적으로 퍼져갔다. 한국은행 역시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예고하였으나 김영상 정부는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매년 300억달러를 유지하고 있다 알리며 이를 불식시켰다. 그러나 1997년 12월 30일 MBC 보도에 따르면 이 때 외채는 이미 무려 1530억달러에 이르는 지경이었다.


재계 순위 14위 한보그룹이 최종 부도 처리되고 26위 삼미그룹 역시 부도, 진로그룹에 이어 재계 8위에 달하는 기아그룹이 사실상 부도를 맞았고 무디스와 S&P사가 연이어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면서 국내외적으로 한국의 신인도는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경제 위기를 애써 부정하던 정부 역시 빌 클린턴 미국 정부와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정부에 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 홋카이도타쿠쇼쿠은행이 파산하고 3대 증권사인 야마이치까지 무너지는 등 아시아 금융위기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아시아 통화기금을 통해 아시아 외환위기에 대응하려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로렌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 차관보는 아시아 통화기금의 안정성에 심각한 우려를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결국 아시아 통화기금은 무산되었다. 1997년 10월 2일 미국 정부가 슈퍼 301조를 발동시켜 한국의 모든 대미 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한국에 대한 특별 차관 제공을 거부하면서 더 이상 우방에 기댈 수 없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마침내 1997년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면서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던 한국의 경제신화는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한국이 IMF 관리 체제로 들어선 12월 3일 MBC 뉴스데스크 이인용 앵커는 “오늘은 가히 국치일이라 할 만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반면 IMF 체제하에서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고 동유럽을 새 시장으로 개척하며 공격적인 경영을 이끌던 대우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를 맞트레이드하면서 위기를 넘기려던 최후의 빅 딜이 무산되면서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됐고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워크아웃으로 몰락했다. 이병철, 정주영과 더불어 재벌 회장 트로이카로 꼽히던 김우중 회장은 중국으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은퇴 위기에 처한 한국의 로베르토 바조


아주대를 졸업하고 1998년 K리그의 명가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한 안정환은 고종수, 이동국과 더불어 세기말의 트로이카로 불리며 프로야구에 밀리던 프로축구의 폭발적인 인기를 되살리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입단 초기에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고종수, 이동국보다 스포트라이트가 덜했던 안정환은 입단 2년 차인 1999년 컵대회 포함 21골을 터트리고 사상 최초 비우승팀 MVP에 등극하면서 K리그 최고 스타로 각광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MVP 등극이 이후 안정환의 커리어를 꼬아놓는 새옹지마가 되고 만다.


대우의 몰락으로 소속팀 대우 로얄즈가 사라지면서 리그 MVP를 달성하면 유럽 진출 추진을 지원한다는 계약을 맺은 안정환의 이전 계약서가 휴짓조각이 된 것이다. 로얄즈를 인수한 부산 아이콘스는 대우의 색채를 빼면서 팀의 구심점이 될 간판스타가 절실했는데, 이 자리에 안정환 만한 적임자는 전무 하니 팀을 인수하자마자 팀의 최고스타를 그냥 보내줄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안정환은 23살에 은퇴를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던졌고, 결국 아이콘스 측은 2000시즌 전반기를 뛰고 여름 이적시장에 안정환을 완전 이적이 아닌 임대 신분으로 유럽에 진출시키도록 합의했다.


결국 2000-01시즌 24살의 전성기를 맞은 안정환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라싱 산탄데르 입단을 코 앞에 두게 됐다. 그런데 일본 최고의 미드필더 나카타 히데토시 영입으로 일본 관광객들의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본 이탈리아 세리에A 페루자가 개입하면서 이적시장의 분위기가 요동친다. 네덜란드 레전드 뤼트 휠릿을 선망하고 1990년대 유럽축구 헤게모니를 지배했던 이탈리아 축구를 외면할 수 없었던 안정환은 논란 속에 페루자로 방향을 선회한다.


하지만 이 때는 몰랐다. 이 선택이 2년 후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지를...


미아 신세가 된 월드컵 영웅


불완전한 임대 신분이자 마케팅 효과도 크지 않은 안정환은 입단 첫 해 벤치를 달구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당시 페루자의 구단주는 기인으로 유명한 루치아노 가우치였는데, 나카타 만큼의 관광객도 유치하지 못하고 경기 출장 시 임대료 조항, 임대 조건 충족 시 완전 이적 등 까다로운 임대 조건으로 지출만 증가할 안정환의 경기 출장을 방해했다는 게 정설이다. 대우의 몰락으로 완전 이적이 아닌 임대 신분으로 유럽에 진출한 안정환은 이탈리아의 심각한 인종차별과 더불어 이렇듯 불안한 입지와도 싸워야 했다.


첫 시즌을 마치고 페루자는 이적료 100만달러에 부산 측에 안정환의 완전 이적을 제의했다. 안정환에게는 불안정한 입지를 벗어 던지고 제대로 이탈리아 리그에서 경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안정환의 상품성을 믿고 수십억을 지출해 대우를 인수한 부산의 모기업 현대산업개발 측은 210만달러의 이적료를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 두 번째 시즌도 로테이션 멤버 이상의 입지를 다지지 못한 안정환이지만 페루자는 부산에 바이아웃에 이르는 이적료를 지불하고 안정환의 소유권을 획득한 뒤, 다가오는 여름 이적시장에 라치오에 그를 넘는 이적료로 안정환을 이적시키면서 수익을 실현할 계획이었다. 이는 안정환에게도 좋은 기회였는데 구단주의 훼방 없이, 유로파리그에 진출하는 더 강한 팀에서, 임대가 아닌 안정적인 신분으로 경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의 2002년 월드컵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안정환은 본래 원톱 황선홍의 백업 자원이었다. 그러나 34세의 노장 황선홍이 조별예선 2차전이었던 미국전에서 머리에 부상을 당하면서 안정환이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됐다. 한편 1982년 스페인월드컵 이후 20년 만의 월드컵 제패를 노리는 이탈리아는 대회 전 아르헨티나, 프랑스에 이어 우승후보 3위로 꼽힐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는 팀이었다. 특히 축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풀백으로 꼽히는 파올로 말디니의 ‘라스트 댄스’였으며 말디니-알레산드로 네스타-파비오 칸나바로 그리고 잔루이지 부폰으로 이어지는 카데나치오의 무게감은 역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조별예선부터 멕시코 스트라이커 하레드 보르헤티에 입이 떡 벌어지는 헤딩골을 허용하고, 선취골을 넣고도 크로아티아에 연이어 두 골을 얻어맞고 무너지는 등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1승1무1패의 부진한 성적으로 조 2위로 겨우 16강에 오르는 신세가 되었다. 반면 우승후보 포르투갈을 무너뜨리고 조 1위로 사상 첫 16강에 오른 한국은 조 1위를 하고도 멕시코가 아닌 2년 전 유로2000에서도 우승을 코 앞에 뒀던 막강한 이탈리아를 만나는 불운에 처했다.


향후 2002년 월드컵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탈리아전 원톱으로 선발 출장한 안정환은 경기 초반 얻은 페널티킥을 부폰의 선방에 막혀 실패한다. 안정환 개인에게는 차라리 이 페널티킥을 집어넣고 크리스티안 비에리에 동점골을 맞은 뒤 경기 종료 직전 설기현이 버저비터를 터트리는 엔딩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연장 후반 이영표의 크로스를 받아 말디니의 위로 솟구쳐올라 부폰의 손이 닿지 않는 완벽한 헤딩 역전 결승골, 월드컵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골든골로 이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 골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안정환의 향후 커리어에는 좋은 쪽이 아닌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안정환은 이후 국내에서는 입단 초기 트로이카였던 고종수, 이동국을 압도하는 슈퍼스타로 등극하는 골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역적으로 전락하는 골이었다. 가우치 구단주는 이탈리아 공영방송에 나와 안정환을 당장 방출시키겠다며 악다구니를 물었고, 훌리건들은 안정환의 집과 차를 박살 내고 살해 협박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정환은 이탈리아에 입국하지 못했고 그의 아내가 안정환의 숙소에서 짐을 빼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해버지에서 배가본드로


가우치의 말마따나 페루자가 안정환의 임대 계약을 해지했으면, 안정환은 부산으로 돌아가 새로운 유럽 이적팀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의 인상적인 활약으로 안정환의 가치가 치솟자 가우치의 아들인 알레산드로 페루자 단장은 SBS 뉴스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실언을 사과하며 여전히 안정환이 페루자 선수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완전 이적을 위한 이적료를 부산 측에 지급하면서 뒤늦게 안정환의 완전 이적을 실현 시켰다.


물론 이탈리아 축구팬의 부정적인 여론이 지배적인 만큼, 페루자가 안정환을 품을 일은 없었다. 대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볼턴 원더러스에 안정환의 완전 이적료의 몇 배에 달하는 이적료를 받고 2002-03시즌을 앞둔 여름 이적시장에 판매하는 ‘장사’를 하겠다는 논리였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기 3년 전에 이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가 탄생하고 지금의 ‘해버지’(해외 축구의 아버지) 칭호는 안정환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국내 에이전트나 유럽 이적시장에 대한 이해가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않았던 때, 안정환의 에이전트인 로얄즈 시절 단장이었던 안종복 ㈜이플레이어 대표와 부산 측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요상하게 흘러간다. 완전 이적료를 지급한 만큼 안정환의 소유권은 페루자에 있었으나, 안종복 대표 측은 안정환이 부산 선수라고 주장하며 독자적으로 이적 협상을 주도했다. 결국 이적시장 뉴스를 가장 발 빠르게 다루는 독일 축구 사이트 트랜스퍼마크트에는 안정환의 오피셜 이적 소식이 동시에 2개가 뜨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하나는 페루자에서 추진한 볼튼에 350만달러의 이적료를 받고 이적하는 뉴스, 다른 하나는 안종복이 멋대로 나선 프리미어리그 블랙번 로버스로의 이적이었다.


여름 이적시장의 마감이 눈 앞에 다가왔을 때, 블랙번이 워크 퍼밋(취업 허가) 부재를 이유로 안정환 영입을 포기하면서 ‘해버지’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이에 대해 안정환은 은퇴 이후 네이트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진짜 이유는 소유권 분쟁으로 인해 블랙번이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토로하며 워크 퍼밋 이슈는 거짓이고 블랙번이 페루자와의 분쟁을 부담스러워 해 영입을 포기한 것이라고 전했다.


결국 볼턴에 250만달러의 차액을 받고 장사에 나서려던 페루자의 계획마저 이적시장 마감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페루자는 국제축구연맹(FIFA)에 제소했고 FIFA 역시 페루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월드컵 영웅 안정환은 국제 미아에 FIFA의 벌금 400만달러 중 36억원이라는 빚만 떠안게 되었다. 이에 일본 파칭코 판매업체 필즈의 자회사가 안정환의 소유권을 부산과 페루자에 웃돈을 주고 사면서 유럽축구를 호령하는 ‘해버지’가 될 줄 알았던 안정환은 결국 26-29세의 최전성기에 이른 시점을 일본 J리그에서 ‘낭비’하게 된다.


이후 안정환은 해외 축구의 아버지가 아닌 ‘배가본드’(방랑자)의 커리어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3년만에 유럽축구로 돌아왔으나 2002년 월드컵 직후 거론되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파리 생제르망 등 명문팀이 아닌 프랑스 리그1의 최하위권 FC 메스였고, 2006년 독일월드컵을 위해 딕 아드보카트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권유로 역시 독일 분데스리가의 하위팀 MSV 뒤스부르크로 반년 임대를 떠났다. 이 와중에도 그는 독일월드컵 조별예선 1차전 토고전에서 슈퍼조커로 출전하여 그림 같은 역전골을 터트리며, 한국 축구에 월드컵 원정 첫 승이라는 새 역사를 선사하면서 다시금 월드컵 영웅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4년 전 영입을 철회했던 블랙번에서 또 한 번 제의가 왔으나, 이미 30줄에 들어섰고 월드컵에서 3골이나 넣은 베테랑에게 바로 영입도 아닌 입단 테스트를 거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다시 에이전트의 미숙한 일 처리로 반년을 무적신세로 보낸 안정환은 국내로 돌아와 수원 삼성과 친정팀 부산 아이파크를 거쳐 중국 프로리그 다롄 스더에서 커리어를 마친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도 선수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리라 기대받았으나, 단 1분의 출전도 허락되지 않았다. 월드컵같이 큰 경기에서 누구보다 강했던 그였던 만큼 16강 우루과이전 마지막 교체카드가 안정환에게 돌아갔다면 다른 결과로 돌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이 박지성, 이영표를 필두로 이청용, 기성용, 구자철 등이 해외축구의 저변을 넓혔고 손흥민, 김민재, 황희찬, 이재성 등이 찬란한 꽃을 피웠다. 하지만 누구도 그 시작에 안정환이 있다고 평가하진 않고, 오히려 지금은 방송인으로서의 아우라가 훨씬 강해 보인다. IMF로 대우가 몰락하지 않고 안정환이 약속대로 완전 이적으로 유럽에 진출할 수 있었다면, 페루자가 아닌 라싱을 택했다면, 월드컵 16강전 상대가 이탈리아가 아닌 멕시코였다면, 골든골이 아닌 페널티킥으로 8강에 올랐다면... 한국 축구사는 완전히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축만없’(축구에 만약은 없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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